홍길주가 펼친 ‘숙수념’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그림. 임경선. 태학사 제공
누가 이 생각을 이루어 주랴 1·2
숙수념
홍길주 지음, 박무영 옮김 l 태학사 l 각 권 3만5000원
홍길주(1786~1841)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19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문장가로 꼽힌다. 명문가인 풍산 홍씨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과거를 통한 입신을 포기하고 전업 작가로 살았으며, 기발한 발상과 절묘한 구성으로 개성적인 문장을 구사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2006년 홍길주의 3부작 문집을 번역 출간한 바 있는 박무영 연세대 교수(국어국문학)가, 이번에는 홍길주의 글 가운데에서도 매우 이색적인 저술로 꼽히는 <숙수념>(孰遂念)을 완역해 펴냈다. 옮긴이는 머리말에서 홍길주와 <숙수념>을 두고 “조선의 한문학이 여기까지 도달했다는 놀라움을 던져 준 작가이며 작품”이라고 말한다.
‘숙수념’은 ‘누가 이 생각을 이루어 줄까’란 뜻으로, 이 저술의 이름이자 저술 속에서 지은이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세계의 이름이기도 하다. 지은이 ‘항해자’(沆瀣子·홍길주의 호)는 “군자가 집을 지을 땐 사당부터 세우며, 사당은 반드시 정남향이어야 한다”며 거주하는 곳을 정하고 건축물을 세우는 데부터 시작해, 가정의 운영, 가정의례, 벗 맞이, 도서관의 장서, 저술에 대한 기획, 산업의 경영과 재물의 사용법, 일상 생활과 놀이 문화, 여행 등 온갖 이야기들을 펼쳐놓는다. 옮긴이는 지은이가 환상 속에서 펼치는 ‘숙수념’이란 공간이 “유가적인 현실성과 도가적인 초월성이 얽힌 장소”이며, 책으로서의 <숙수념>은 “이 공간을 책 걸이, 혹은 글 걸이로 사용한다”고 짚는다. 건물을 지었으니 건물기와 상량문이, 건물 내부를 채우는 기물들이 있으니 각각의 기물명이, 도서관과 출판소가 있으니 그곳 책에 대한 설명이, 사람들이 있으니 일상생활에 대한 지침과 훈계가 제시되는 식이다.
이렇다보니 <숙수념> 속에는 정통 한문학 장르의 글들뿐 아니라 ‘문원아희도보’처럼 손님을 맞아 즐기는 문학 게임의 매뉴얼, 아직 지어지지 않았거나 영원히 끝나지 않을 책의 서문, 학업 계획표, ‘묘지식’ 같은 실용 서식, <기하신설> 같은 본격적인 수학적 증명, 실재와 관념을 자유롭게 건너다니는 여행기 등 그야말로 모든 종류의 글들이 모여 있다. 공간의 인접성을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기존 문집의 문체별 분류에 따르지 않고 주제(念)별로 글들이 꼬리를 물며 배치된다는 점도 독특한 특징이다.
19세기 교양 세계를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거대한 도서관 같은 이 책에 대해, 옮긴이는 “19세기 조선 벌열(閥閱)의 겸인(傔人)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봤다. 당시 세도정치의 시작으로 과거제도는 실질적인 입신의 관문으로서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질적·양적으로 성장한 지식인 집단이 세도가문의 문객 혹은 막객 노릇을 하던 현실이, 자족적인 ‘문화공화국’을 만드는 홍길주의 환상으로 그려졌다는 풀이다. <숙수념>이 내용적으론 유가적인 경세 윤리를 강조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기문과 유희, 잡다한 기예의 강렬함이 이보다 훨씬 두드러진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옮긴이는 “유가적 현실 참여의 태도보다는 도가적 초월의 태도, 특히 도가적 상상력이 전체를 관통하며, 지은이 스스로도 이를 의식하고 있다”고 짚었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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