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물론: 인터뷰와 지도제작
릭 돌피언·이리스 반 데어 튠 지음, 박준영 옮김 l 교유서가 l 1만9800원
최근 물질 또는 자연을 보는 새로운 사유의 경향으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신유물론’이다. 고대 유물론으로부터 근대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인간 정신 바깥에 있는 물질 세계에 집중하는 유물론의 전통 자체는 유구한 것이지만, 심지어 그런 사유들의 내부에서조차 인간 존재를 특권적인 주체로 전제하거나 암시하는 초월론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전통과 위상학적인 접근이 끊임없이 발견되어왔다. 그러나 철학뿐 아니라 과학, 문화이론, 페미니즘 등 여러 영역에서 이런 이원론적 접근의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들이 누적되었고, 1990년대부터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학자들 사이에서도 어떤 공통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유의 경향이 등장했다.
네덜란드 출신 두 학자가 엮고 쓴 <신유물론>(원저는 2012년 출간)은 이처럼 백화제방하고 있는 새로운 사유의 경향을 ‘신유물론’이라는 말로 묶고 정리하려 시도한 책이다. 신유물론은 어떤 선험적인 이론적 틀을 전제하지 않으며, ‘간-행’(intra-action) 같은 개념에서 보듯 ‘차이’를 ‘횡단’하는 형이상학이다. 따라서 “신유물론은 이 책에서 ‘축조’되지 않는다.” 1부에서 신유물론의 경향을 드러내는 네 명의 학자(로지 브라이도티, 마누엘 데란다, 캐런 버라드, 캉탱 메야수)의 인터뷰를 싣고, 2부에서 이들이 공유하는 지점들을 살펴나가는 방식으로 책을 구성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책의 부제이자 2부 제목인 ‘지도제작’(cartographies)도 이런 식의 접근법을 드러낸다.
신유물론은 질 들뢰즈(1925~1995)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연구에서 ‘신유물론’이라는 말을 썼는데, 1996년 마누엘 데란다가 이 용어를 본격적으로 꺼내들었다. 2000년대 초 로지 브라이도티는 페미니즘 이론을 유물론적으로 가다듬으며 “이 용어를 만들고 그 계보를 규정”했다. 학자들마다 문제 의식이나 주목하는 지점, 강조하는 대목 등에 차이가 있지만, 그 뒤로 신유물론의 경향은 페미니즘, 과학·기술 연구, 미디어 및 문화 연구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스며들고 또 배어나오고 있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로지 브라이도티. 로지 브라이도티 누리집
지은이들은 신유물론이 “이원론을 급진적으로 재사유하는 문화론을 제안한다”고 정리한다. ‘근대’ 앞에 아무리 ‘탈’(post)을 붙였어도 ‘인간/자연’처럼 이항 대립을 축으로 삼는 이원론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는데, 그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물질에 대한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근대의 과학적 유물론이 한 가지 물질, 즉 물질의 진정한 재현(representation)을 감안하고 탈근대 문화 구성주의가 그와 동일한 진정한 재현들을 과도하게 감안하는 반면, 신유물론에 의해 의문에 부쳐지고 전환되는 것은 바로 이 공통적인 재현주의이다.” 신유물론은 근대와 탈근대가 모두 인정하지 않았던, “물질 스스로가 변형적인 힘”에 주목한다. 이전까지 단지 재현을 통해서만 말해지는 대상이거나 더불어 말하는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물질의 수동성을 기각하고, 그것의 능동성과 영향을 새롭게 사유하는 것이다. “물질은 스스로가 변형적인 힘이며, 그 진행중의 변화 과정에 어떤 재현성도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이를 바탕으로 신유물론은 이원론을 끊임없이 회피하려 시도하는데, 그 중요한 성격은 횡단성이다. 지은이들은 이원론이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이유로 ‘부정성’도 지목한다. 두 개의 대립항은 언제나 서로에 소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부정은 “연속하는 부정성과 진보의 서사”를 그리며 끊임없는 이원론을 만들어낸다. “부정은 부정성에 의해 이원화된다.” 이 같은 이원론의 ‘자기포획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 신유물론자들은 부정의 한 축에 서는 것이 아니라 이항 대립의 관계성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이원론을 횡단하거나 돌파”하려 한다. 예컨대 마누엘 데란다는 ‘시장’과 ‘국가’라는 이원적 대립항에 대해 “(문제는) 그런 개념들이 이원성을 띠기 때문이 아니라 둘 다 실재하지 않는 일반성들로 구상화되기 때문”이라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구상화된 일반성들을 구체적인 집단으로 대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신유물론자들은 “서로 차이를 형성한다고 선언되는 각각의 현상이 아니라, ‘차이 자체’를 그려나가는 데에서 사유를 시작한다.” 말하자면 가로지르거나 교차하는 방식으로 이원론 자체를 무력하게 만드는 ‘질적 전환’을 시도하는 것이다.
특히 지은이들은 신유물론주의 페미니즘이 ‘성차’ 문제를 사유하는 방식에 집중하는데, 이는 신유물론이 ‘근대성의 이원론적 논리’를 가로지르는 시도를 가장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성차에 의한 배제가 정당화되는 현실에 대해, 성차를 제거하기 위해 성차를 받아들이고 생산해야 하는 페미니즘의 역설이 일어났다. 이처럼 “젠더가 성을 정의하는” 사회구성주의와 “성이 젠더를 정의하는” 생물학적 본질주의가 이항 대립하는 가운데, 신유물론주의 페미니즘은 성차를 극복함으로써가 아니라 실증적이거나 경험적 관점에서 성적 차이를 더욱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그 안에서 “천 개의 작은 성들”을 재창조하는 방식으로 ‘사유의 혁명’을 꾀한다. ‘있음’에 머무르지 않고 ‘되기’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이는 ‘수행적’(performative)인 실천철학이 된다.
“모든 지적 전통들에 ‘그래, 그리고’라고 말하면서 그들 모두를 횡단”하는 신유물론은, 사물이나 사태를 어떤 명령 아래 놓인 고정성에 가두지 않고 그 배치를 유연하게 사유한다는 점에서 미래에 대한 새로운 기획으로 조명받는다. 옮긴이인 박준영 수유너머104 연구원은 해설에서 “신유물론은 이론 자체의 보편성이나 개념들의 영원성을 주장하지 않으며, 언제나 당대의 과학과 교전하면서, 그로부터 나오는 개념을 통해 새로워지며 발전해나간다”고 정리했다. 최근 ‘신유물론’을 특집 주제로 다룬 계간지 <문화과학>에 실은 기고에서는 신유물론이 “당대를 ‘인류세’(Anthropocene)로 규정하고 이를 ‘살게 하는’ 방향으로 이끌 윤리-정치적 모색을 한다”고 평가했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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