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 오래되고 중요한 먹거리인
바다음식의 여러 측면 두루 다뤄
옛 일기 등에는 관련 생활상 묘사돼
“우리 수산물 다양성 세계 최고 수준”
바다음식의 여러 측면 두루 다뤄
옛 일기 등에는 관련 생활상 묘사돼
“우리 수산물 다양성 세계 최고 수준”
조영석의 <어선도>(1733년). 어부 가족이 출어를 준비하는 모습을 그렸다. 따비 제공
싱싱한 바다 내음에 담긴 한국의 음식문화
정혜경 지음 l 따비 l 2만원 “칠패의 생선전에 각색 생선 다 있구나/ 민어, 석어, 석수어와 도미, 준치, 고도어며/ 낙지, 소라, 오적어며 조개, 새우, 전어로다/ (…)/ 어물전 살펴보니 각색 어물 벌여 있다/ 북어, 관목, 꼴뚜기며 민어, 석어, 통대구며/ 광어, 문어, 가오리며 전복, 해삼, 가자미며/ 곤포, 메욱, 다시마며 파래, 해의, 우무가시.” 조선 헌종 10년(1884년) 한산거사가 지은 풍물가사 ‘한양가’ 중 서울의 시장에서 팔리고 있는 수산물을 묘사한 대목이다.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만큼 다양한 수산물이 유통되고 있다. 수산물은 우리 민족의 오래되고 중요한 먹거리였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적 특성을 감안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도 한국은 세계에서 수산물을 가장 많이 먹는 나라다. <바다음식의 인문학>은 한식연구가 정혜경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교수가 <밥의 인문학> <채소의 인문학> <고기의 인문학>에 이어 내놓은 책으로, 우리나라 바다음식의 역사와 문화, 조리법 등을 두루 다뤘다. ‘바다음식’은 지은이가 바다생선, 민물생선, 조개류, 해조류 등을 통칭해 붙인 것이다. 지은이는 먼저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바다음식의 역사를 살펴본다. 우리나라는 해안선이 남북으로 긴데다 연해안은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고 있어 계절에 따라 여러 가지 해산물이 산출된다. 이런 자연환경 덕에 농경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어패류가 주요한 식량이었다. 농경생활이 정착되면서부터는 곡류가 주식이 되고 어패류가 부식이 된다. 수산물의 가공법도 점차 발달해, 생선을 말리거나 젓갈을 담그는 조리법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긍은 <선화봉사고려도경>(1123년)에서 “고려 풍속에 양과 돼지가 있지만 왕공이나 귀인이 아니면 먹지 못하며, 가난한 백성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고 적어, 바다음식이 서민들에게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같은 책에서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상용하는 음식”도 언급되는데 바로 젓갈이다. 2010년 태안 앞바다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화물선 마도 1호선에는 젓갈을 담았던 도기가 30점이나 실려 있었다. 조선시대가 되면 먹는 어류 종류가 요즘과 비슷해진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어업기술이 발전하면서 어종과 어획량이 크게 증가한다.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잔치(1902년)를 기록한 <진연의궤>에 묘사된 각색절육(각종 포를 잘라 쌓은 궁중음식)에는 온갖 해산물이 올라간 것을 볼 수 있다. “각색절육 1그릇: 홍어·상어 각 50마리, 백대구어 70마리, 광어 30마리, 문어 5마리, 전복 70개, 관포 10접, 편포·오징어 각 5접, 강요주 1동, 추복 5동, 건대하 50급, 해대 20가닥, 잣 1되.” 조선시대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 1782~1793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식품들을 꼼꼼하게 정리해 놓았는데, 가장 많이 받은 식품은 생선이었다. 외국인들에게도 조선사람들의 생선 사랑은 눈에 띄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지리학자 샤를 바라의 <조선 기행>은 “민물 어업은 생선이라면 날것, 말린 것, 또는 그 밖의 여러 방식으로 저장한 것을 가리지 않고 항상 즐겨 먹는 조선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생업이다”라고 적고 있다.
김홍도의 <고기잡이>(18세기 후반). 물고기 떼가 잘 드나드는 바다 한가운데에 대나무 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갇힌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그렸다. 따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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