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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윤리적 대안일까, 과학적 분석일까

등록 2021-09-24 04:59수정 2021-09-28 15:34

[한겨레Book] 이권우의 인문산책

노동가치
박영균 지음 l 책세상(2009)

오래전 <마르크스를 읽는 밤>이라는 책을 써볼까 궁리한 적이 있다. <자본>도 번역되었고, <칼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도 나온 마당에 다 읽어보고 느낀 바를 정리하는 것도 뜻깊겠다 싶었다. 거기에다 요설과 현학으로 점철된 포스트모던 관련 도서를 읽으며 느꼈던, 해석만 하지 변혁의 길을 펼쳐 보이지 못한다는 실망감이 다시 마르크스를 읽고 싶게 했다. 그런 열망도 잠시, 혼자 밤새 읽는 거야 무어라 하겠느냐만 죽은 개 취급 받는 마르크스를 읽고 쓴 책을 누가 보겠느냐 자책하며 스스로 계획을 접었다. 다시 그런 책을 써보겠다는 마음은 없지만, 이런저런 일이 동기가 되어 몇 달 전부터 찬찬히 강신준이 옮긴 <자본>을 다시 읽고 있다.

<자본>을 읽으며 학생 때 읽었던 도미즈카 료조(富塚良三)의 <경제학원론>이 얼마나 친절한 해설서인지 새삼 느꼈다. 1장 상품부터 7장 잉여가치율까지는 긴장하고 정성들여 읽어야만 이해가 되는데, 30년 전에 읽은 책 내용이 어슴푸레 떠올라 도움이 되었다. 그러다 노동가치설에 해당하는 부분을 거듭 읽다가 불현듯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자본>은 자본주의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책이라기보다는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의 삶을 개선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비롯한 윤리학이 아닐까 싶었다. 이런 관점에서 <자본>의 목차를 재편성하면 흥미롭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8장 노동일을 1장으로 삼고, 24장 본원적 축적을 2장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원래의 1장부터 7장은 그다음에 이어지게 하고 말이다.

<자본>을 잠시 접어놓고 ‘망상’ 수준의 발상에 근거를 얻고 싶어 <노동가치>를 펼쳤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내 망상은 한방에 날아갔다. 마르크스는 <경제학-철학 수고> 때까지만 해도 윤리적 관점에서 고전 경제학을 비판했으나, 이후에는 자본의 작동방식을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해명”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나는 계속 마르크스가 말한 “잉여가치는 오로지 v(즉 노동력으로 전화한 자본부분)에서 일어나는 가치변화의 결과일 뿐”이라는 대목을 문제 삼고 싶었다. 정말, 잉여가치는 오로지 노동에서만 비롯하는 것일까. 고전경제학도 이 문제를 고민했다. 이윤의 원천을 “①수요와 공급에 따른 가격변동을 이용한 상인의 영민한 능력, ②그 상품의 내재적 가치, 즉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효용의 희소성”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단순 물물교환에서는 물건에 투하된 노동시간에 따라 교환이 이루어지지만, 자본주의에서는 이윤, 지대, 임금으로 상품가격이 결정된다는 애덤 스미스의 주장도 설득력 있다. 특히 지식정보사회에서는 가치생산의 핵심인 정보재가 무형의 정신노동에 근거하고, 무한복제가 가능한지라 노동가치론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흥미로웠다.

나는 아무래도 <자본>이 귀납적 구성이라기보다는 연역적 사고의 결과물이라고 읽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노동자가 겪는 삶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윤리적 의지가 노동가치론을 재평가하고 이를 토대로 잉여가치론을 세운 것이 아닐까 상상한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나를 지지하는 글을 찾아보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노동가치론을 다룬 정운영의 논문을 읽었는데, 그 마지막 구절은 이러했다. “나는 가치이론 자체가 철저한 휴머니즘 위에 구축되었다고 단언한다.”

다시, <자본>을 펼쳤다. 윤리학으로 계속 ‘오독’해 나가보아야겠다.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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