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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철학의 사다리 오르내리며 ‘짝퉁’ 골라내기

등록 2006-02-09 20:09수정 2006-02-12 15:58

아테네의 아카데미아에서 제자들한테 기하학을 가르치고 있는 플라톤. 플라톤은 기원전 387년경 철학 및 학문 일반의 교육과 연구를 위한 기관으로 아카데미아를 세워 철학뿐만 아니라 수학과 수사학 등 여러 학문을 탐구했다. 그림 나폴리국립고고학박물관 소장, 글 한길사 펴냄 <스피스테스>에서.
아테네의 아카데미아에서 제자들한테 기하학을 가르치고 있는 플라톤. 플라톤은 기원전 387년경 철학 및 학문 일반의 교육과 연구를 위한 기관으로 아카데미아를 세워 철학뿐만 아니라 수학과 수사학 등 여러 학문을 탐구했다. 그림 나폴리국립고고학박물관 소장, 글 한길사 펴냄 <스피스테스>에서.
‘소피스트는 가짜 지식인이다’ 규정
거짓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변할까봐
비존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
사이비 근거 찾으려
인식론·존재론 사유 거쳐 다시 현실로
고전 다시읽기/플라톤 <소피스테스>

플라톤의 대화편들로서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비롯한 초기 대화편들, 그리고 중기 대화편들로 일컬어지는 <파이돈> <향연> <국가> 등이 가장 많이 읽힌다. 그러나 그가 원숙기에 쓴 대화편들을 읽을 때 우리는 플라톤 사유의 또 다른 깊이와 맛을 음미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 <테아이테토스> <티마이오스>는 각각 존재론, 인식론, 자연철학에서 플라톤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연 대화편들이다. <파이드로스> <필레보스> 역시 독특한 맛을 풍기는 걸작들이다.

이 대화편들과 더불어 플라톤 사유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화편들로 <소피스테스> <정치가>가 있다. 플라톤은 이 두 대화편과 더불어 3부작을 이룰 <철학자>를 기획했으나 아쉽게도 이 대화편은 씌어지지 못했다. 이 3부작은 소피스트, 정치가, 철학자라는 세 부류의 인간들을 대조시키면서 진정한 지식인은 어떤 사람이고 진정한 정치가는 어떤 사람인지를 밝히기 위해서 기획된 연작이다.

<소피스테스>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소크라테스-플라톤이 평생의 논적들로 삼았던 소피스트들에 대한 대화편이다. 가짜 지식인으로서의 소피스트를 고발하고, 그 과정에서 진리의 문제, 존재의 문제 등 철학의 굵직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걸작이다. 후기 플라톤 사유의 전체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대화편이다.

이 대화편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한 가지 이유는 그 논의 구도에 있다. 이 대화편은 하나의 주제를 단조롭게 전개하기보다는 여러 가지의 주제를 복합적으로 접속시키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 접속이 너무나도 절묘해서 이 대화편의 통일성과 치밀함에 조금도 손상을 입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각 악장이 독자적인 울림을 전해주면서도 조화로운 전체를 들려주는 협주곡과도 같다. 중요한 것은 각 절편들의 배치이다.

이 대화편의 출발점은 사이비 지식인들로서의 소피스트들에 대한 고발이다.(그 뒤에는 참다운 정치가와 참다운 철학자에 대한 탐색이 복선으로 깔린다) 따라서 대화편의 출발점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맥락이다. 그러나 논의가 진행됨에 따라 주제는 점차 본격적인 인식론적-존재론적 문제들로 넘어간다. 사유는 현실에서 출발해 점차 근본적인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차원(존재론)의 문제를 해결한 뒤 플라톤의 논의가 본래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이 대화편은 원환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다.


플라톤 ‘대화’편…논의 구도 감동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을 엉터리 지식을 팔아 치부(致富)하는 사이비 지식인으로 규정하는데, 주목할 것은 그가 구사하고 있는 논의 방법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규정하고 평가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근거이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대개 이성적 근거는 없고 감정적 평가/매도만이 존재한다. 근거를 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을 규정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분할의 방법이다. <파이드로스>와 <정치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 방법은 플라톤의 후기 철학을 이해하는 한 관건이다. 플라톤은 어떤 전체를 그 하위 부분들로 분할하는 방법을 통해서 소피스트란 존재는 도대체 지식세계, 담론세계 전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를 해명하려 한 것이다. 플라톤의 이런 방법론은 이후 학문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렇게 분할해 본 결과 결국 소피스트들은 가짜를 진짜로 속여 팔아 치부하는 존재로 규정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근거가 필요하다. 이런 주장이 성립하려면 오류/거짓이라는 것이 존재해야 하기에 말이다. 어떤 소피스트가 만일 오류/거짓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변한다면, “당신은 오류/거짓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가짜 지식인이다”라고 말할 근거가 없겠기에 말이다.

그런데 오류/거짓이란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또는 그런 것을 그렇지 않다고), 없는 것을 있다고(또는 있는 것을 없다고) 주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오류/거짓이라는 것이 성립하려면 다시 ‘비존재’가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이제 비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던 파르메니데스에 반(反)해서 비존재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다. 처음에 소피스트들을 겨냥했던 논의가 점차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제 그리스 존재론의 거목인 파르메니데스를 겨냥하게 되는 것이다. 가짜 지식인의 문제에서 오류/거짓의 문제로, 그리고 다시 존재/비존재의 문제로 사유의 수준이 점차 높아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현실-존재론-현실 순환구조

이렇게 이 대화편은 처음에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부터 출발했던 논의가 인식론적 문제제기를 거쳐 마침내 철학 최고최대의 문제인 (비)존재의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대화편의 핵심 부분은 이 비존재에 대한 논의로 채워진다.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를 넘어서기 위해 ‘친부살해’를 감행하고, 당대까지의 존재론사를 검토하는가 하면, 경험주의자들(또는 감각주의자들)과 형이상학자들의 투쟁을 그린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을 논하기도 한다. 나아가 판단의 문제와 유(장르)들 간의 공통성, 비존재의 존재, 다섯 개의 최상위 유들, 타자로서의 비존재 같은 굵직한 문제들을 쏟아낸다.

이렇게 존재론을 확립하고서 이제 플라톤은 다시 현실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논의의 디딤돌이었던 오류/거짓의 문제가 다시 재론된다. 즉 확립된 존재론에 근거해서 오류/거짓의 문제가 새로운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제 논의가 처음 출발했던 지점, 즉 “소피스트들이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되돌아온다. 가짜 지식인의 문제에서 시작해 오류/거짓의 문제로, 다시 존재/비존재의 문제로 올라갔던 사유가 다시 오류/거짓의 문제로, 가짜 지식인의 문제로 내려오는 것이다. 이런 오르내림은 ‘관조적 삶’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실천적 삶’으로 내려오는 ‘양방향의 삶’을 실제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이런 오르내림을 통해 논의의 원환이 완성되고 있다

결국 플라톤은 사이비 지식인들을 고발하려는 현실적인 문제에서 출발해 인식론을 거쳐 존재론으로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인식론을 거쳐 본래의 문제로 돌아온 것이다. 이런 원환 운동은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철학함이란 무엇인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다 탄탄한 근거를 찾아내고 그렇게 찾아낸 근거를 가지고서 처음 출발했던 문제로 되돌아오는 이 논의 구도만큼 사유함, 철학함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경우도 드물다. <소피스테스>를 철학사의 최고 고전들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의 내용 외에도 이러한 논의 구도 자체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인 것이다.

철학함이란 무엇인가 선명

이정우/철학아케데미 공동대표
이정우/철학아케데미 공동대표
플라톤이 평생 사유했던 문제들은 어떻게 가짜와 진짜를 가려낼까 하는 것이었다. 요새 식으로 말해 어떻게 짝퉁을 고발해서 가짜가 판치는 이 세상을 정화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구별이 가능하려면 어떤 이상적 모델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이상적 모델을 근거로 우리는 지금 이 사물이 과연 그 이상적 모델에 가까운 진짜인지 아니면 한참 떨어진 가짜인지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제시된 것이 이상형으로서의 이데아들의 존재다. 말[馬]의 이데아가 존재할 때 우리는 그 이데아에 비추어서 오추마는 좋은 말이고 로시난테는 나쁜 말이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 진짜/가짜를 둘러싼 윤리적 문제와 존재/무를 둘러싼 존재론적 문제는 한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플라톤 사유의 이런 성격을 찬찬히 음미할 수 있게 해 주는 대화편이 바로 <소피스테스>다.

서평자 추천 도서

소피스테스

플라톤 지음, 김태경 옮김

한길사 펴냄(2000)

(현재 유통되고 있는 유일한 번역본. 헬라어를 근거로 성실하게 번역한 책이다)

플라톤 전집 5

최민홍 옮김

상서각/성창출판사 펴냄(1983/1986)

(국내 유일의 플라톤 전집이다. 일본어본을 중역한 것이긴 하나 가독성은 나쁘지 않다)

플라톤 후기 철학 강의(박홍규 전집 4)

박홍규 지음

민음사 펴냄(1995)

(<소피스테스>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후기 대화편들에 대한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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