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우/도서평론가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귀환/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윤수종 옮김. 이학사 펴냄
허를 찌르는 것만큼 통쾌한 것은 없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으면서 갈라진 휘장 안에 얼핏 나타난 진면목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가 견고한 이론의 성채를 쌓은 철학자와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면, 당연히 예상치 못한 질문으로 그 사람의 알려지지 않은 속살을 드러내고 싶을 터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그 열망을 이룰 수 있을까. 네그리를 만난 두푸르망텔은 의외의 방법을 들고 나온다. “당신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낱말들을 알파벳 순으로” 물어보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선형적인 질문이라는 무기로 자기방어라는 벽을 공략해보겠다는 뜻이다. 의도를 알아차린 네그리도 제안을 적극 수용한다. “이전에 결코 말한 적이 없는 주제들도 포함해서 나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그러면, 질문자의 의도는 적중했을까.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대체로 성공작이라 평할 만하다. 연대기순으로 되어 있지 않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은 우려는 금세 불식된다. 외려 질문이 어디로 튈지 몰라 긴장하게 되는 면도 있고, 질문에 저항하는 네그리의 모습도 있어 흥미롭다. 그리고 ‘20세기 말의 그람시’라는 수사에 가려져 있던 네그리의 인간적 면모도 만나게 된다. 상처였단다, 프랑스로 망명한다는 것이. 그때는 오로지 살아남을 궁리만 했다. 육체적 생명에 대한 집착 때문에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한 일은 아이를 갖는 것이었다. 두려웠단다, 반쪽 자유만이라도 허용해달라고 청원했을 적에 거부당할까 봐. 이때 위안이 된 것은 기도와 어머니였다. 그렇다고 읽기만 하면 책 전체가 저절로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읽는이가 의미를 재구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비로소 이해의 지평이 열린다.
극적인 삶을 산 혁명적 이론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을 기록한지라,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잠언이 수두룩하다. “실제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열정이 없는 존재”라는 구절은 꼭 나를 두고 한 말 같다. 내 삶은, 이를테면 교양주의 정도에 불과할 성싶다. 앎에 대한 열정이 나 자신과 세계에 대한 변혁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열은 “극도로 강렬한 차가운 지속성”이라는 말은 이즈음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에 답을 던져주었다. <대학>에 나오는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 이라는 구절에 매달리고 있는데, 참된 것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강렬할 차가움’이 요구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위험한 것은 어떤 예언주의입니다”라는 말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이 마음속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기획과 계몽이 저지른 엄청난 과오를 기억할 때 특이성, 역능, 공통적인 것, 자율, 잡종 등속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전쟁과 양극화가 오늘의 세계를 상징하는 열쇳말이 되었다. 네그리는 말한다. 자본주의는 폭력없이 살아남을 수 없다고. 그리고 익명화한 억압의 정체를 밝혀야 하는데, 그것에 이름을 붙이면 배제나 빈궁, 고통이나 빈곤일 것이라고. 신자유주의라는 덫에 걸린 우리가 네그리를 주목해야 할 이유를 여기서 발견한다. 개인적으로는 <제국>을 비롯한 네그리의 여러 책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으리라는 ‘도둑놈 마음보’를 품고 읽었는데, 그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귀환>은 네그리 사상의 요약본이나 총결산이 아니라, 그에게 이르는 첫 징검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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