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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전봉준, 박헌영, 노무현, 세월호…죽은 자의 입이 되기로 결심하다

등록 2021-09-03 05:00수정 2021-12-10 17:48

이들은 무슨 꿈을 꾸었기에 비참하게 죽은 걸까

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
손홍규 지음 l 문학사상 l 1만4500원

두 번 놀랐다. 처음은, 책의 지도 격인 ‘차례’를 보았을 때. ‘1895년 4월24일. 1956년 7월19일. 2009년 5월23일. 2014년 4월16일.’ 각 연월일은 전봉준, 박헌영, 노무현, 세월호 승객들이 세상을 떠난 날을 가리킨다. 아, 이렇게도 소설을 쓸 수 있구나. 격통에 가까운 상실들을 한 소설로 엮어낼 수 있는 작가구나.

다음은, 이 묵직한 소설이 무게 잡지 않고 노래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다. 모두 열두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네 개의 날짜가 세 번 반복되는 ㄱ-ㄴ-ㄷ-ㄹ-ㄱ-ㄴ-ㄷ-ㄹ-ㄱ-ㄴ-ㄷ-ㄹ 형태다. 돌림노래처럼 흐른다. 소설이 노래한다는 더 강력한 증거는, 호흡으로 이완된 문장이었다. 충실한 자료와 밀도 높은 통찰로 군더더기는 낄 틈조차 없는 문장에 숨 쉴 곳은 많아서, 400쪽에 이르는 분량을 ‘힘들게’ 읽을 필요가 없다. 힘보다 호흡이 독자를 가볍게 밀어준다. 경직되어 호흡이 모자란 몸에선 노래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노랫말을 잊기 힘든 것처럼, 노래는 기억을 오래 유지시켜준다. 

손홍규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이 나왔다. <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 119년이란 시간을 넘나들며 한국 근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마주하는 소설이다. 서울로 압송된 뒤 교수형을 기다리는 동학농민군 대장, 마흔한 살 전봉준. 북한 부수상을 지냈으나 수상(김일성)의 제거 대상이 되어 지하감옥에 갇힌 남로당의 거두, 쉰일곱 살 박헌영. 검찰 조사를 받고 돌아와 봉하마을 ‘지붕 낮은 집’을 서성이는 예순넷의 노무현 전 대통령, 제주도행 배를 타러 인천으로 향하는 고등학생 ‘해원’. 죽음을 앞둔 이들의 마지막 시간이 실감 나게 복원된다. 치밀하게 직조된 역사적 사실은 기본이고, 이들의 “마음”과 “꿈”마저 헤아림으로써 실감은 거의 실체에 가까워지는 듯하다.

왜 다른 누구도 아닌 전봉준, 박헌영, 노무현, 세월호 아이인가. 손홍규 작가는 지난 1일 <한겨레>와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전봉준과 박헌영은 실패한 혁명가이지요. 노무현도 실패한 민주주의자이고, 세월호는 이유도 모른 채 생존에 실패한 참사였지요. 그리고 전봉준은 실패했지만 근대의 출현을 앞당겼고, 박헌영은 실패했지만 남북이 등한시한 가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노무현도 실패했지만 민주주의는 쟁취하는 것만큼 지켜내는 것도 중요함을 일깨웠고, 세월호는 우리 시대가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이들 모두가 저에게 주는 화두는 ‘대체 무슨 꿈을 꾸었기에 그들은 비참하게 죽어야 했는가’였어요. 혁명, 민주주의, 인간의 존엄성, 이렇게 쉽게 요약하는 대신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꿈인지, 인간적인 꿈이 과연 가능한지 알고 싶었어요. (…) 내가 진짜 알아야 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어요.” 

등단 20년차 소설가 손홍규. 최근 펴낸 여섯 번째 장편소설 &lt;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gt;를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글쓰기를 돌아보고 어디로 더 갈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기착지에 이른 지금, 전환점이 되어준 소설이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등단 20년차 소설가 손홍규. 최근 펴낸 여섯 번째 장편소설 <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를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글쓰기를 돌아보고 어디로 더 갈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기착지에 이른 지금, 전환점이 되어준 소설이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책 속에서도 같은 결의 문장을 만날 수 있다. “죽은 자의 벌려진 입이 되기로 결심했어요.” 이 의지는 침묵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침묵이란 말의 부재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 않은, 하지 못한 말만으로 이루어진 것 역시 침묵이니. 그러므로 “살아남은 자는 죽은 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는지를 헤아려야만” 한다.

이 소설의 시점을 보자. 얼마나 주의 깊게, 다양한 관점으로 발화하는지. 전봉준의 시간은 전지적 작가 시점(3인칭), 박헌영의 시간은 제한적 전지적 작가 시점(선택적 시점·3인칭), 노무현의 시간은 노무현을 관찰하는 존재의 1인칭 시점, 세월호의 시간은 2인칭 시점으로 서술된다. “이 과정은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을 상징할 수 있다고 여겼어요. 인간과 세계가 분리될 수 없는 전봉준의 시대를 거쳐, 박헌영의 시대에 이르면 인간과 세계는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노무현의 시대에 이르면 개인은 세계에서 완벽히 분리되어 고립되지요. 마지막으로 세월호에 이르면 2인칭으로 변하는데, 2인칭, 그러니까 ‘당신’은 타자의 호칭이지만 그 타자 안에 이미 (‘당신’을 부르는) ‘나’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결국 너와 나를 아우르는 ‘우리’가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연대순은 분명하나, 전봉준-박헌영-노무현-세월호의 시간은 소설 속에서 휘어지고 서로를 침투한다. 그 중심에 있는 이가 다른 시공간을 맺어주는 초월적 존재, 해원이다.

감옥에서 전봉준과 만나는 눈먼 예언자, 감옥 밖에서 박헌영을 감시하지만 노래를 잊었다는 그를 위해 인터내셔널가를 불러주는 청년, “아저씨, 할아버지… 이 고약한 늙은이야 제발 뒤를 보란 말이야” 노무현을 지켜보며 그의 결단을 되돌리려 애원하는 중음신(사람이 죽은 뒤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상태), “엄마” 물속에서 소리 내지 않고 불렀을 아이, 소설 맨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 배운 말이 엄마 하나인 작은 아기로 누워 “소리를 내어도 내지 않아도 부드럽고 따뜻했던” 그 한마디에 엄마 아빠를 행복하게 해주던 그 아이. 이 모든 존재의 이름은 같다. 해원(원통한 마음을 풂).

지난해 펴낸 소설집(<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 맨 앞에 실린 작품 ‘예언자’에 이어 이번 소설에도 해원이란 예언자가 등장했다. 작가 손홍규에게 예언은 단지 앞날에 관한 언어가 아니었다.

“누구나 죽는 순간 예언자가 된다고 봐요. 예언이란 결국 과거를 포함해 삶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을 때 가능한 거라고 생각해요. 미래를 말할 수 있으려면 삶 전체를 이해해야겠지요. 삶을 온전히 아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예언, 후대에게 들려줄 수 있는 예언이 아닐까요.”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려는 성실한 몸짓 속에 해원의 시작이 들어 있다는 말. 순간, 그의 소설이 다시 한번 음악적으로 느껴졌다. 모든 소리는 몸을 포함한 악기 속에 잠자코 들어 있다. 가만히 두면 결코 들리지 않는다. 악기를 쥐고 움직이는 손에, 미래의 노래가 들어 있는 것이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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