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그로쓰
지구를 식히고 세계를 치유할 단 하나의 시스템 디자인
요르고스 칼리스·수전 폴슨·자코모 달리사·페데리코 데마리아 지음, 산현 포럼 기획, 우석영·장석준 옮김 l 산현재 l 1만5500원
누구든 “이런 방식의 삶은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떠올려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인간 사이의 착취, 나라 사이의 착취, 자연을 대상으로 한 착취를 기반으로 한 경제 시스템은 끊임없이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비용을 발생시키고, 우리는 그 대가로 찾아온 빈곤과 불평등, 기후위기를 맞이한다. “지속가능한 발전”, “녹색 성장” 같은 대안 담론들도 이젠 익숙하지만, 그보다 더욱 급진적인 대안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탈성장’, 곧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멈춰야만 미래를 열 수 있다는 것이다.
<디그로쓰>는 탈성장 담론의 주요 내용과 정책적 제안 등을 간명하게 담고 있는 책으로, 탈성장 진영의 허브로 꼽히는 ‘리서치 앤드 디그로쓰’에 참여하는 생태경제·정치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썼다. 1970년대 앙드레 고르가 ‘데크루아상스’(décroissance) 개념을 쓴 뒤 본격적으로 발전해온 탈성장 담론은 오늘날 사회적 모순과 생태적 모순을 동시에 해결하려는 운동의 한 축을 대표한다. 지난해 원저가 출간된 이 책은 탈성장 담론의 가장 최신 모습을 소개한다.
탈성장 담론은 “파이 자체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생산·소비할 뿐 아니라 더 적게 생산·소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총생산(GDP)으로 표현되는 경제성장은 자연환경에 해를 가하는 물질의 증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전지구적인 환경 충격의 변화를 그래프로 그려보면, 국내총생산의 성장 궤적과 유사하게 나타난다. 생태적인 비용뿐 아니라 부채와 빈곤, 불평등 등 사회적인 비용도 발생시킨다. 더 많은 잉여를 획득하기 위해 인간이 자연에 비용을 떠넘긴 것처럼, 인간과 인간,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비용 전가, 곧 착취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이 빈곤과 불평등의 해법처럼 제시되기도 하지만, 지은이는 경제성장이 되레 그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에서 국내총생산이 3배 성장했음에도 지난 40년 동안 평균임금의 구매력은 전혀 늘지 않았다. 2018년 1/4분기에 24경7천조라는 기록적인 수치에 도달한 전세계 부채는 해마다 평균 11.1% 증가하고 있다.
경제성장을 내려놓자는 주장에는 수많은 의문이 뒤따를 수 있다. 생산과 소비의 감축이 지구환경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일자리와 소득의 전반적인 감소로 빈곤과 불평등은 급격히 커질 것이라는 반론이 대표적이다. 여러 나라에서 지속가능한 발전, 녹색 성장 등은 선언하면서도 탈성장은 감히 말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다섯 가지 정책을 묶음으로 제안한다. 경제성장 없는 그린뉴딜, 보편 기본 소득과 서비스, 커먼스 되찾기, 노동시간 단축, 이 네 가지 개혁을 뒷받침할 공공 금융 등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그래픽 장은영 soobin35@hani.co.kr
그냥 그린뉴딜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총 에너지 사용량 감소를 이루기 위해선 “경제성장 없는 그린뉴딜”이 불가피하다. 모두가 돈 걱정 없이 음식, 주택, 대중교통, 교육, 의료 등을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게 하는 보편적 기본 서비스와 보편적 기본 소득이 마련된다면, 이를 위한 물질적인 환경을 갖출 수 있다. 영국에선 국내총생산의 2.3%에 해당하는 비용으로 주거, 음식, 교통, 인터넷 접근을 보편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경우 상위 10~15% 부유층에 대한 과세를 조금만 늘려도 성인 1인당 국민소득의 15~22.5%에 해당하는 기본소득을 지급할 수 있다고 한다. 성별 분업과 착취에 해당하는 무급 돌봄 활동에 대한 ‘보편 돌봄 소득’도 필요하다. 그동안 삶의 모든 영역을 상품화·사유화해온 데 맞서, 지방자치단체나 협동조합 차원에서 주택, 의료, 돌봄 등 다양한 공공 영역을 이윤이 아닌 필요에 따라 운용하게끔 하는 ‘커먼스/커머닝 활성화’도 중요한 정책이다.
생산에 들어가는 자원의 감축은 결과적으로 동일한 재화를 생산하는 데 더 많은 노동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때 노동시간의 단축은 더 많은 이에게 더 많은 기회를 열어줄 수 있다. 이윤과 국내총생산 확대를 목표로 삼지 않으면, 정부의 세입과 지출을 더욱 새로운 방식으로 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회를 지탱하는 것’(사람들이 수행하는 노동)에 과세하는 대신 탄소부담금 등 ‘사회를 파괴하는 것’(공해와 불평등)에 과세하는 것이 한 사례다. 자산·소득에 대한 누진적 과세, 최저임금·평균임금 인상과 최고소득 제한 등도 공공 금융을 실현하는 방법들로 꼽힌다. 이런 정책들의 시너지가 “에너지 전환, 공정 고용, 인간과 자연환경의 동시 안녕”을 가능케 하리라는 전망이다.
책의 마지막 단락 ‘묻고 답하기’에선 이밖에 탈성장에 대한 여러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싣고 있다. “더 적은 자원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나” 질문에는 “성장 경제에서는 자원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수록 자원은 더 저렴해지고, 사용되는 자원의 총량이 증가하게 된다”고 짚는다. “오염시키는 자원을 청정자원으로 대체할 수 있지 않나” 질문에는 “태양광과 바람은 석탄보다 깨끗하지만,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리튬이나 코발트를 사용하는 배터리에 저장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기존 화석연료 시스템에 에너지를 더할 뿐인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부 국가는 경제성장을 지속하면서도 탄소 배출량을 줄였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실제로 경제협력개발기구 36개국 가운데 18개국이 2005~2015년 사이 해마다 평균 2.4%씩 탄소 배출량을 줄였다. 그러나 이들의 에너지·국내총생산 성장률은 평균 1%로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적은 수준이었고, 그럼에도 탈탄소화는 요구되는 수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2019년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유럽 그린딜’을 내놓으며, “무한정한 경제성장이라는 도그마를 종식”하자고 밝혔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탈성장을 목표로 내세운 정부는 지구상에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출처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페이스북
“빈곤과 불평등을 줄이려면 경제성장이 필요하지 않나” 물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2008년 기준으로 고소득 국가 총인구의 24%가 여전히 자국 내에서 허용되는 최저 수준 이하의 물질로 살고 있는 등 “지난 수십 년 동안 경제성장을 이룩했음에도 빈곤과 불평등은 줄어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탈성장론이 가난한 국가들의 경제성장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에는, 그런 국가들에게 꼭 유럽이나 미국 같은 성장형 사회가 건설되어야 하는지 되묻는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깨끗한 물, 공공 의료, 적정가의 주택, 식량이 필요한 것이지, 자국 엘리트들이 보유한 해외은행 계좌의 금액 증대로 귀결되곤 하는 국내총생산 성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은이는 “뒤에서 성장을 추격하고 있는 나머지 국가들에 훈수를 늘어놓기 전에 자기네 국가부터 정비해야 한다”며, 이른바 선진국들에게 “가장 먼저 저소득 국가에서 고소득 국가로 향하는 돈과 천연자원의 유출을 중단시키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 담벼락에 “유일하게 지속가능한 성장은 탈성장”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무엇보다 지은이가 강조하는 것은 “가능성의 공진화”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사회문화 시스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며, 성장 강박을 떨쳐내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개인들 자신이 급진적으로 변하고 다른 이들과 연결되어 더 큰 규모의 정치 개혁을 예시하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때”, 더 나은 삶을 위한 제도적 변화까지 이뤄낼 가능성이 피어난다. ‘탈성장’ 구호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전세계 곳곳에는 이미 시장질서와 경제성장 논리에 포섭되길 거부하고 그저 ‘좋은 삶’을 가꾸기 위한 다양한 움직임이 펼쳐지고 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협동경제 생태계에선 사업체 300곳과 개인 6천여명이 재생가능한 전력과 의료 혜택, 돌봄과 주택을 공유한다. 이 밖에 자전거로 출퇴근하거나, 도시 텃밭을 가꾸거나, 지역 공동체에 참여하거나, 이민자·여성·노동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등 수많은 사람들의 소박한 행동들이 뿌리줄기(리좀) 같은 네트워크를 만들어내고 있다.
지은이는 탈성장을 옹호하는 핵심 근거는 결국 “협동과 공유를 기반으로 한 소박한 삶은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이라고 말한다. 또 “제도적·구조적 개혁들의 동력은 이미 다른 식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며, 탈성장 운동의 문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활짝 열어놓는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일정한 한계에 도달하면 껍질의 나선을 작게 말아 줄여가는 달팽이는 탈성장 운동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디그로쓰>의 번역 출간을 기획한 ‘산현 포럼’은 출판·연구공동체 산현재의 프로젝트를 기획·실행하는 주춧돌 조직으로, 김영준(변호사), 우석영(생태철학자), 이헌석(정의당 녹색정의위원회), 장석준(정의당 정의정책연구소), 정정기(임원경제연구소), 한재각(기후정의 활동가)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