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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힙지로에 지적 알박기’…철학 전문공간 소요서가

등록 2021-08-17 04:59수정 2021-08-17 07:31

서점이자 출판·아카데미 공간
‘철학이란 무엇인가’ 물으며
을지로 공구상가에 문열어

목수·회계사·미술교육가 등
10여명 공부모임에서 출발

“힙지로란 이름의 욕망 한가운데
현실의 표본 같은 곳에서
사유할 수 있는 계기 만들려”
철학책을 전문으로 다루는 독립서점이 서울 중구 세운청계상가 3층에 닻을 내렸다. 문을 연지 갓 한달이 지난 13일 낮 ‘소요서가’ 운영자들이 서점 들머리와 서가에서 책 진열상태 등을 둘러보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철학책을 전문으로 다루는 독립서점이 서울 중구 세운청계상가 3층에 닻을 내렸다. 문을 연지 갓 한달이 지난 13일 낮 ‘소요서가’ 운영자들이 서점 들머리와 서가에서 책 진열상태 등을 둘러보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전자제품과 부품, 각종 기계와 공구 상가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서울 을지로 세운청계상가 한가운데에 뜻밖의 질문이 등장했다. 보통 점포 이름이 적힌 간판이 들어서야 할 위치에 한국어, 프랑스어, 중국어, 아랍어 등 여덟가지 언어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간판이 걸린 것이다. 이곳은 지난달 10일 처음 문을 연, 철학 전문 서점을 표방하는 서점 ‘소요서가’다. 서점 안에는 동서양 철학의 고전 원전들과 해설서, 입문교양서 등 철학 책들만이 가득하다. 전자·공구 상가 밀집지역에 철학 전문 서점을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데, 이곳은 책을 펴내는 출판사이자 강연을 펼치는 아카데미이기도 하다.

지난 13일, 이 흥미로운 서점-출판사-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주체인 ‘연구소 오늘’ 운영진을 만났다. 올해 봄 출범한 연구소 오늘은 형식적으로는 법인이지만, 실질적으론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10여명이 일종의 재능기부 형태로 운영하는 협동조합에 가깝다. 목수, 회계사, 미술교육가, 예술가, 철학전공자, 출판인 등이 사적인 인연을 이어오다, ‘철학·예술 공부를 함께 하자’는 제안으로 을지로의 한 허름한 사무실에서 정기적인 공부모임을 시작한 것이 소요서가를 만드는 데까지 이르게 됐다. 다만 이들은 “소요서가의 성과가 특정인에게 귀속돼선 안된다”며 운영진 개개인을 드러내는 것은 원치 않았다.

본격적인 출발은 출판이었다. 읽고 싶은데 번역되지 않은 책들이 많아 “그럼 우리가 출판사를 차려서 펴내자”고 뜻을 모은 것이다. <베르그송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베르그송과 아인슈타인 사이에 벌어진 시간에 대한 논쟁인 <물리학자 대 철학자> 등 이미 10여종의 번역서들을 계약했고, 전체 30여종의 책들을 작업 중이라고 한다. 그러자 서점도 함께 운영해보자는 내부 구성원의 제안이 나왔고, 논의 끝에 ‘생계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면 운영이 가능하겠다’고 판단했다. 또 ‘철학 전문 서점’이라는 구체적인 방향성도 정했다. 프랑스의 유명 철학 전문 출판사 겸 서점인 ‘브랭’(Vrin)을 모델로 삼은 것도 있지만, 일차적으론 현실적인 이유가 컸다고 한다.

“교보문고 같은 대형 서점이나 인터넷 서점은 그 본질이 서점보다는 복합문화센터나 쇼핑몰에 가깝습니다. 반면 독립서점은 책에 더 집중하지만 컬렉션의 깊이 등에서 한계가 있어요. 도서정가제가 유명무실해진 탓에, 높은 원가를 부담해야 하는 독립서점에서는 대중적으로 팔리지 않는 책을 들여놓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소요서가는 아예 ‘철학 전문’이라는 전문성에 더 집중해 보기로 했어요.”

‘철학 전문’답게 전문성에 대한 철학적인 풀이까지 내놓았다.

“저자와 독자 사이를 연결하는 서점은, 개념과 현실 사이를 연결하는 철학과 ‘매개와 이행’이라는 활동에서 공통점을 가집니다. 게다가 소요서가는 출판, 아카데미와 연계한 다양한 기획이 가능하기 때문에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인·애호가에게도 뜻깊은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어요.”

을지로라는 지역의 ‘특산물’이라는 전문성도 고려했는데, 이는 ‘왜 하필 을지로 청계세운상가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과도 맞닿는다. 을지로의 미로 같은 골목들에는 여전히 오래된 자생적 생태계가 있지만, 재개발 계획은 역설적으로 이 지역을 낙후된 곳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이런 갈등이 빚어내는 부조화와 풍경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최근 ‘힙지로’라는 이름의 어떤 욕망으로 소비된다. 운영진은 “개념을 현실로 이행시키는 것이 철학이라면, 소요서가는 현실의 표본 같은 을지로에 위치함으로써 어떤 개념들이 우리의 자화상을 그릴 수 있을지 사람들로 하여금 사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려고 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서점을 연 뒤 “‘힙지로’에서 철학 책을 들고 사진 찍으면 허세의 끝판왕이겠다”는 반응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운영진은 “일각에서 ‘지적인 허영을 강화한다’는 욕을 먹더라도, 오래됨을 위하는 척하며 오히려 파괴에 앞장서는 자본에 맞선 ‘지적 알박기’를 해보겠다는 것이 우리의 각오”라고 말했다.

철학책을 전문으로 다루는 독립서점이 서울 중구 세운청계상가 3층에 닻을 내렸다. 문을 연지 갓 한달이 지난 13일 낮 ‘소요서가’ 운영자들이 서점 들머리와 서가에서 책 진열상태 등을 둘러보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철학책을 전문으로 다루는 독립서점이 서울 중구 세운청계상가 3층에 닻을 내렸다. 문을 연지 갓 한달이 지난 13일 낮 ‘소요서가’ 운영자들이 서점 들머리와 서가에서 책 진열상태 등을 둘러보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철학 전문 서점 ‘소요서가’는 상호를 적어넣는 간판 자리에 “철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여덟 개의 각기 다른 언어들로 적어놨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철학 전문 서점 ‘소요서가’는 상호를 적어넣는 간판 자리에 “철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여덟 개의 각기 다른 언어들로 적어놨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철학책을 전문으로 다루는 독립서점이 서울 중구 세운청계상가 3층에 닻을 내렸다. 문을 연지 갓 한달이 지난 13일 낮 상가를 지나던 시민들이 책을 살펴보기 위해 ‘소요서가’에 들어서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철학책을 전문으로 다루는 독립서점이 서울 중구 세운청계상가 3층에 닻을 내렸다. 문을 연지 갓 한달이 지난 13일 낮 상가를 지나던 시민들이 책을 살펴보기 위해 ‘소요서가’에 들어서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문을 연 지 이제 한 달째인데, 기대보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줘서 운영진도 약간 고무된 상태다. 새로운 문화체험을 한다는 느낌으로 찾아주는 일반인들, 굳이 찾아와 값나가는 철학 원전들을 사주는 애호가들이 꽤 많다고. 대체로 “대형 서점보다 철학 책이 더 많다”는 평가를 듣는다고 한다. ‘이러저러한 책들은 없네요?’, ‘절판된 책은 없나요?’ 하면서 서점과 ‘배틀’을 펼치려 드는 고객도 있다. 근처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이 퇴근길에 들러서 “예전에 강의도 들었는데…” 하며 철학에 대한 그리움을 되살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실연을 당했을 때 볼 만한 철학책을 추천해달라, 젊은 남자가 들고 다니면 ‘폼’ 날 듯한 책을 추천해달라 등 재밌는 요청을 하시는 고객도 있었어요. 그러면 우리 역시 ‘철학 전문 서점’의 정체성에 입각해서,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이나 앙리 베르그송의 <웃음> 등 원전을 사보시라고 당당하게 추천해드립니다.”

그리 넓지 않은 소요서가의 내부 공간 디자인 역시 이들이 지향하는 바를 담고 있다. 되도록이면 원전을 중심으로 접근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원전들을 전시한 서가와 해설서들을 전시한 서가를 분리했다. 철학사 및 사전 류도 따로 분리했다. 일반인이나 애호가라고 해서 원전을 읽지 않고 해설서에만 기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전을 중심으로 하되 해설서와 사전류를 옮겨다니며 접근할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잘 알려진 원전들은 다 구해놓자는 원칙을 세우고, 절판된 책들도 왠만하면 헌책방을 통해서라도 다 갖춰놓겠다는 생각이다. 다만 아직 서양철학에 대한 편중이 큰 것이 약점이라 했다. 운영진은 “철학 분야 장서를 정리하려는 계획이 있으신 분들은 꼭 우리에게 연락을 주셨으면 좋겠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올해 연말부터는 작업해오던 번역서들이 하나둘 출간으로 이어질 계획이다. 이번 달부터는 한 달에 두 차례씩 전체 24회에 걸친 ‘서양철학사’ 강의를 연다. 출판과 서점에 이은 아카데미 활동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철학 뿐 아니라 예술 분야 강의도 기획하고 있고, 강의록을 모아 책으로도 출간할 예정이다. 중장기적으로는 연구 활동을 강화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번역과 강의를 통해 다양한 연구자들과 네트워크를 만들고, 이들에게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독일 보수주의자들의 계보를 추적하는 프로젝트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일단 하이데거의 ‘블랙노트’ 편집을 주관한 피터 트로니의 연구 성과를 번역해 소개할 계획인데, 이와 함께 독일 뮌헨 현대사연구소에서 작업한 히틀러 <나의 투쟁>에 대한 비판본 등을 국내에 소개한다거나, 이를 박정희 등 국내 보수주의에 대한 연구로 연결한다거나 하는 등 다양한 연구 활동을 일으켜 보고자 합니다.”

이처럼 연구소에서 시작한 흐름이 출판과 서점, 아카데미를 거치며 전문가와 애호가, 일반인 모두를 전반적으로 성장하게 하고 그 성과를 공유하는 것이 소요서가가 꿈꾸는 큰 그림이다. 운영진은 “눈 앞의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소박한 생각들을, 스스로의 역량에 대한 물음을 거치며 현실로 옮기고 있는 과정”이라며, “소요서가의 ‘세계관’은 앞으로 꾸준히 정립되고 확장되어 갈 것”이라고 밝혔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소요서가

서울 중구 을지로 160 세운청계상가 바열 309호

soyoseo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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