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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자유, 혁명, 사랑…시적 모험이 그려낸, 시들지 않는 ‘사상 개화’

등록 2021-08-16 04:59수정 2021-08-16 08:07

[거대한 100년, 김수영] ⑬ 꽃

철저한 도시인으로서
자연·전통 멀리했지만
유독 꽃 시어 자주 등장

사물의 고정 관념 아닌
생리·명석성 바로 보고
내용·형식을 한 몸처럼
시 형식 실험으로 확장

경이로웠던 꽃의 사상
반복-변주하는 꽃의 리듬
유작 ‘풀’까지 흔적 남아
글라디올러스 꽃.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글라디올러스 꽃.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김수영은 평생 이분법과 싸워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민지와 해방, 전쟁과 분단, 냉전과 이념 대립, 혁명과 반동의 역사는 무수한 관념과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격전장이었다. 당시의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는 성글고 거친 것이었지만 정치와 제도뿐 아니라 예술과 생활 전반에 걸쳐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김수영에게 냉전은 남북, 미·소의 체제 갈등만이 아니라 우리 주위의 사물을 얼어붙게 하고 우리의 문화를 불모케 하는 온갖 경직된 관념들을 의미했다. 그는 이 모든 냉전의 해소를 시대의 과제이자 시의 과제로 인식했다.

“그(=시인)는 언어를 통해서 자유를 읊고, 또 자유를 산다”(‘생활 현실과 시’)라고 말했던 김수영은 말의 자유, 시의 자유, 정치의 자유가 다르지 않다고 믿었다. 그는 “김일성 만세”를 인정하는 언론의 자유를 바랐고 ‘모리배’들의 말에서 언어와 생활의 일치를 구하고자 했다. 이처럼 일상어는 물론 속어나 욕설, 일본어와 한자어, 낯선 조어나 알파벳을 시에 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김수영이 오히려 멀리했던 것은 자연이나 전통과 관련된 시어들이었다. 그는 철저한 도시인이었고 현대성을 천착했으며 우물 속에 빠진 민족이 아니라 세계 시민이고자 했다.

그러한 김수영의 시에 꽃과 관련된 시어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의외로 여겨질 수 있다. 깨꽃, 달리아, 글라디올러스, 국화꽃, 아카시아, 싸리꽃, 능금꽃, 장미, 연꽃, 금잔화 등 품종도 다양하다. 그러나 여러 연구자들이 주목했던 것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꽃과 꽃잎에 대한 김수영의 시적 모험이 그려낸 사상의 개화였다. 꽃의 첫 등장은 해방 이후 최초로 모더니즘을 표방한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수록된 ‘공자의 생활난’(1945)에서다. 이 시는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라는 문제적 문장으로 시작한다. 얼핏 자연의 생리에 어긋나 보이는 이 표현에 대해 ‘상부에 꽃을 달고 있는 어린 열매’를 말한다는 황현산의 설명은 김수영이 관념이 아니라 관찰에 근거하여 썼다는 것을 알려준다.

시 ‘구라중화’ 육필 원고.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시 ‘구라중화’ 육필 원고.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김수영의 산문 ‘생활 현실과 시’의 육필 원고.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김수영의 산문 ‘생활 현실과 시’의 육필 원고.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하지만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열매의 상부를 한창 흐드러지게 핀 꽃보다 앞세워 전제하는 것은 사실의 관찰이되 사실 이상의 새로움을 품고 있다. 요령부득의 이 시에서 직설적 서술로 이루어진 4연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첫 발표작을 <예술부락>에 실었다는 이유로 모더니스트들로부터 낡았다는 소리를 들었던 김수영이 그들과의 공동 시집에 이 시를 수록하기로 결정한 맥락을 고려할 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라는 문장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을 가르는 손쉬운 논리(‘국수’는 낡은 것, ‘마카로니’는 새로운 것이라는 식의)에 대한 일침이자 어떤 다짐으로 읽힌다.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바로 보겠다는 것은 포즈나 이론이 아닌, 사물에 대한 정직한 직시로부터 시의 길을 찾아보겠다는 선언이 아니었을까?

빗대어 말하자면 김수영은 ‘꽃’이라는 단어에 씌워진 숱한 관념과 이미지를 지우고 꽃의 생리와 수량과 한도와 우매와 명석성을 바로 보고자 했다. ‘구라중화’(1954)에서 ‘글라디올러스’라는 영어 대신 일본어도 중국어도 아닌 생경한 한자 조어 ‘구라중화(九羅重花)’를 만들어 쓴 것도 외래종 꽃 이름이 지니는 이국적 이미지나 모던의 포즈를 지우기 위한 의도였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김수영이 김춘수처럼 모든 의미와 현실을 제거한 무의미의 꽃을 말하려 한 것은 아니다. 김수영의 꽃은 “현대의 가시철망 옆에 피어 있는 꽃”, 현재와 현실을 살고 있는 꽃이다. 한 줄기에 달린 여러 송이가 시차를 두고 피고 지는 글라디올러스의 생리는 설움과 미소를, 생기와 신중을 한 몸에 지닌 채 죽음을 거듭하는 자유의 몸짓과 다르지 않다.

김수영에게 사물을 정직하게 보는 법은 쓰는 법과 분리되지 않는다. 꽃을 바로 본다는 것은 곧 꽃이라는 사물 자체의 운동을 따라가며 쓰는 일, 그러니까 내용과 형식을 동시에 밀고 가는 온몸의 이행이다. 이러한 사물과 언어의 연금술을 비교적 정련된 방식으로 그려낸 시가 ‘꽃 2’(1956)다. “꽃이 피어나는 순간/ 푸르고 연하고 길기만 한 가지와 줄기의 내면은/ 완전한 공허를 끝마치고 있었던 것이다”라는 서술은 사실의 관찰이되 사실을 넘어선 생명의 진실을 보여준다. 김수영은 지나온 것과 도래할 것이 한 점에서 만나는 이 경이로운 순간에서 “중단과 계속과 해학이 일치되”는 꽃의 사상을 얻는다.

꽃에 대한 김수영의 지속적 탐구가 자유와 혁명과 사랑이라는 꽃의 사상으로 만개한 것은 죽기 1년 전에 쓴 ‘꽃잎’(1967)에서다. ‘꽃잎 1, 2, 3’은 <김수영 전집> 1981년 초판과 2003년 개정판에 연작시로 수록되었다가, <현대문학> 1967년 7월호에 세 편을 묶어 ‘꽃잎’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것이 확인되면서 2018년 새로 정비한 3판에는 한 편의 시로 수록되었다. 일찍이 황동규는 ‘꽃잎’을 시작으로 ‘풀’을 통과하여 연장될 “하나의 새롭고 확실한 선”이 시인의 죽음으로 단절된 것을 안타까워한 바 있다. 이후 ‘꽃잎’은 김수영 스스로 전환해 나갔을 후기시의 단초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받았다.

&lt;문학예술&gt; 1956년 7월호에 발표된 시 ‘꽃’. 전집에는 ‘꽃 2’로 실려 있다. 맹문재 제공
<문학예술> 1956년 7월호에 발표된 시 ‘꽃’. 전집에는 ‘꽃 2’로 실려 있다. 맹문재 제공

시 ‘꽃잎’의 김수영 육필 초고.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시 ‘꽃잎’의 김수영 육필 초고.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김수영은 4·19 혁명 직후 감격과 환희의 목소리로 급격히 고조되었다가 이후 혁명의 정신이 좌초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현실과 시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찬찬히 더듬어 갔다. 그는 혁명 이후의 생활과 시를 끌고 갈 힘을 부정의 정신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 시기 여러 산문에서 보이는 ‘여유’ ‘긍정’ ‘사랑’ 등의 단어는 이후 ‘온몸의 시학’과 ‘반시론’으로 귀결될 시적·정치적 전향의 토대였다. 가령 ‘생활의 극복’에서 말하는 긍정의 연습은 사물을 고정된 사실로 바라보려는 욕심을 제거하고 모든 사물과 현상을 내부로부터 보는 연습이다. 이는 사물 자체에 대한 충실성을 통해 주체와 언어와 사물이 자율적으로 이행하는 시의 형식에 대한 실험으로 이어졌다.

‘꽃잎’은 이러한 형식 실험에 대해 처음으로 확신을 갖게 해준 ‘눈’(1966)과 연속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 형식 실험의 요체는 반복과 변주를 통한 의미의 구축과 해체, 이를 통해 언어의 서술(내용)과 언어의 작용(형식)이 하나의 리듬을 생성해내도록 하는 것이다. ‘꽃잎 1’은 작고 미세한 바람의 움직임으로 시작하여 거대한 바위와 작은 꽃잎이 만들어내는 운동, 단절과 지속이라는 혁명의 리듬을 보여준다. ‘꽃잎 2’에서는 주술적 반복을 통한 언어의 작용이 두드러진다. “꽃을 주세요” “노란 꽃을 주세요” “노란 꽃을 받으세요”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믿으세요 노란 꽃을”로 이어지는 반복구 속에서 의미의 축적이 거듭될수록 우연과 혼란이 확산되는 전개는 그 자체로 말의 교환과 실패, 완성과 결핍을 왕복하는 시의 의미 작용처럼 보인다. 다소 추상적인 1·2편과 달리 현실적 맥락이 도입된 ‘꽃잎 3’에는 지식인인 나의 낭비와 허위에 대비되는 ‘순자’에 대한 미래적 기대가 드러난다.

‘조금’의 작은 움직임으로 시작하여 ‘웃음’과 ‘아우성’으로 증폭되는 이 장중하고 변화무쌍한 꽃잎의 리듬은 혁명 이후의 시간을 지속하는 힘, 해학과도 같은 진리를 찾아가는 길, 시와 삶을 긍정하는 사랑의 실천을 담고 있다. 김수영은 바람, 풀, 꽃잎, 순자와 같은 “실낱같은” 존재들로 실패한 혁명, 실패한 시의 “실낱같은 완성”을 도모했다. ‘꽃잎’에 보이는 바람과 풀, 숙임과 일어섬, 먼저와 나중, 웃음과 아우성, 그리고 반복과 변주의 모티프는 김수영의 마지막 작품 ‘풀’(1968)로 이어졌고, 언어와 사물과 주체가 시의 리얼리티를 밀고 가는 온몸의 시에 대한 모험은 거기서 종료되었다.

김수영은 우리에게 기지(旣知)의 꽃을 잊어버리라고, 미지(未知)의 것이 당겨와 피어나는 지금 여기의 노란 꽃을 받으라고 했다. 김수영의 꽃은 미완이고 못난 데도 있다. 꽃보다 꽃을 지지하는 산문의 줄기가 더 요란하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한국 현대시사는 김수영의 꽃을 완성품으로 숭배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기입된 비뚤어진 글자를 다시 세우고 다시 비틀면서 그가 하고자 했으나 완수하지 못한 것, 그 문제 설정의 용기와 정직한 실패에서 배웠다. 그것이 김수영의 꽃이 시들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이다.

오연경 교수.
오연경 교수.

오연경 고려대 교양교육원 교수, 문학평론가

꽃잎

1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고 자기가 가 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 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 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 내릴
한 잎의 꽃잎 같고
혁명 같고
먼저 떨어져 내린 큰 바위 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고
나중에 떨어져 내린 작은 꽃잎 같고

2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 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 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 싫은 노란 꽃을

3

순자야 너는 꽃과 더워져 가는 화원의
초록빛과 초록빛의 너무나 빠른 변화에
놀라 잠시 찾아오기를 그친 벌과 나비의
소식을 완성하고

우주의 완성을 건 한 자(字)의 생명의
귀추를 지연시키고
소녀가 무엇인지를
소녀는 나이를 초월한 것임을
너는 어린애가 아님을
너는 어른도 아님을
꽃도 장미도 어제 떨어진 꽃잎도

아니고
떨어져 물 위에서 썩은 꽃잎이라도 좋고
썩는 빛이 황금빛에 닮은 것이 순자야
너 때문이고
너는 내 웃음을 받지 않고
어린 너는 나의 전모를 알고 있는 듯
야아 순자야 깜찍하고나
너 혼자서 깜찍하고나

네가 물리친 썩은 문명의 두께
멀고도 가까운 그 어마어마한 낭비
그 낭비에 대항한다고 소모한
그 몇 갑절의 공허한 투자
대한민국의 전 재산인 나의 온 정신을
너는 비웃는다

너는 열네 살 우리 집에 고용을 살러 온 지
3일이 되는지 5일이 되는지 그러나 너와 내가
접한 시간은 단 몇 분이 안 되지 그런데
어떻게 알았느냐 나의 방대한 낭비와 난센스와
허위를
나의 못 보는 눈을 나의 둔갑한 영혼을
나의 애인 없는 더러운 고독을
나의 대대로 물려받은 음탕한 전통을

꽃과 더워져 가는 화원의
꽃과 더러워져 가는 화원의
초록빛과 초록빛의 너무나 빠른 변화에
놀라 오늘도 찾아오지 않는 벌과 나비의
소식을 더 완성하기까지

캄캄한 소식의 실낱같은 완성
실낱같은 여름날이여
너무 간단해서 어처구니없이 웃는
너무 어처구니없이 간단한 진리에 웃는
너무 진리가 어처구니없이 간단해서 웃는
실낱같은 여름 바람의 아우성이여
실낱같은 여름 풀의 아우성이여
너무 쉬운 하얀 풀의 아우성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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