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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조선 개혁의 걸림돌, 사복시의 서리들

등록 2021-08-13 04:59수정 2021-08-13 09:07

[한겨레Book] 강명관의 고금유사

박학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이지만, 관운은 없어 미관말직 몇 곳을 거치고 생을 마감한다. 그럼에도 그는 평생 썼던 일기 <이재난고>(頤齋亂藁)에 자신의 미관말직에 대해 꼼꼼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정보다. 예를 하나 든다. 1778년 1월 사복시(司僕寺, 조선시대 왕이 타는 말, 수레 및 마구와 목축에 관한 일을 맡던 관청) 주부(主簿)에 임명된 뒤의 일기다.

사복시의 관직은, 양반사족이 맡는 관직과 중인 부류가 맡는 잡직(雜職)이 있는데 다 합쳐도 10명 이하다. 그 아래 실무를 맡아보는 서리는 수십명에 달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서리들이 서울 대가(大家)의 하인이라는 것이다. 황윤석은 또한 이 서리들이 어느 집안 하인인지 낱낱이 밝혀 두었다.

사복시 서리는 마적색(馬籍色) 9명, 목장색(牧場色) 6명, 공방색(工房色) 4명, 군색(軍色) 4명, 호방색(戶房色) 3명, 내사(內寺) 4명으로 모두 30명이다. 이들 30명은 최고위층 양반가의 하인이다. 구체적으로 밝히면, 봉조하 김치인(2명), 정승 정재숭(1명), 판서 윤급(1명), 영돈녕 김양택(4명), 판서 구윤옥(1명), 수어사 홍낙성(2명), 병조판서 이휘지(3명), 판부사 이은(1명), 우의정 서명선(4명), 좌의정 정존겸(5명), 판서 권적(1명), 판서 김종정(1명), 판서 서명응(1명), 정승 홍중보(1명), 영의정 김상철(2명)이 사복시 서리를 내고 있는 집안이다.

조선시대에는 원하는 사람의 수에 비해 관직이 턱없이 적었으므로, 재직기간을 짧게 하여 여러 사람에게 차례가 돌아가게 하였다. 이러니 관료들은 실제 행정실무를 익힐 시간이 없었다. 붙박이로 있으면서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것은 서리들이었다. 실제 서리들이 관료조직의 주인이고 양반관료들은 과객(過客)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서리는 어떻게 뽑았던가? 원래 ‘취재’(取才)란 시험을 거쳐 서리를 선발했지만(<경국대전>), 영조대의 <속대전>에 오면 ‘취재’가 폐지되었다고 밝혀놓았다. 국가가 실무관료의 선발 과정을 없애버린 것이다. 대신 서울 경화세족(京華世族, 국가 권력을 장악하여 귀족화한 양반) 가문의 청치기(겸인(傔人), 곧 하인)가 서리가 되는 관행이 성립하였고, 이 관행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이 관행은 모든 관청에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이 관행의 존재는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소수의 경화세족이 사적으로 관료조직의 실무그룹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정치권력을 장악한 뒤 사적으로 행정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양자 사이에 이익의 공유가 있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조선은 온갖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지만, 어떤 개혁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작금의 개혁 지체 현상을 보면서 250년 전 사복시의 상황을 떠올린다. 외견상 달리 보이지만, 어떤 개혁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구조는 동일할 것이다. 이 구조를 해부해 들여다보고 무엇이 이 구조를 만들어내었는지 따져보아야 하지 않을까?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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