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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생명의 ‘값’은 평등하게 매겨지지 않는다

등록 2021-08-06 04:59수정 2021-08-07 02:30

9·11테러 희생자 보상금 30배 차이
민사소송 배상도 소득 따라 달라져
성·인종별 격차 생명가치까지 영향
“인권과 생명 보호되도록 애써야”

생명 가격표
각자 다른 생명의 값과 불공정성에 대하여
하워드 스티븐 프리드먼 지음, 연아람 옮김 l 민음사 l 1만8500원

지난 1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이 법에는 원청업체나 경영책임자가 부담해야 할 벌금의 하한선이 없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5월 이를 최소 1억원으로 규정한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이탄희 민주당 의원은 “업무상 사망사고에 대해 법원은 노동자 1인당 평균 450만원이라는 터무니없는 벌금액을 선고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판·검사 등 엘리트의 목숨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숨이 다르지 않아야 한다”며 “실제로 사람 목숨에 가격이 매겨지는 것과 마찬가지고, 그게 신분과 계층에 따라 다른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 2일 대법원은 음주운전자의 차량에 치여 사망한 의대생 ㄱ씨에 대한 손해배상 관련 소송에서 손해배상액 산정에 전문직 소득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놨다. 1·2심에서는 ㄱ씨가 사망 당시 소득이 없던 학생 신분이었던 점을 들어 25~29살 남성의 전 직종 평균 수입을 기준으로 손해배상액을 정했으나, 대법원은 “ㄱ씨가 생존했다면 의대를 졸업해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ㄱ씨가 전문직으로서 소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심리해 손해배상액 산정의 기초가 되는 소득을 정했어야 한다”고 밝혔다. 1·2심이 판결한 배상액은 4억9000여만원, 부모들이 의사 소득을 기준으로 청구한 배상액은 10억6000여만원이다.

지난 6월19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중대재해 노동자 합동추모제가 열려 참가자들이 행진을 준비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지난 6월19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중대재해 노동자 합동추모제가 열려 참가자들이 행진을 준비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세계인권선언문은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생명에는 값을 매길 수 없다”는 말도 흔히 들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엄연히 생명의 ‘값’이 매겨지고 있으며, 더구나 그 값은 동등하지도 않다. 미국의 통계학자이자 보건경제학자인 하워드 스티븐 프리드먼이 지은 <생명 가격표>는 현실 세계에서 생명의 가치가 매겨지는 방법과 그 결과 및 한계들을 다룬 책이다.

책은 2001년 ‘9·11테러’ 희생자들에게 지불된 보상금 사례부터 시작한다. 당시 보상금 총액은 70억달러, 희생자 1인 평균 지급액은 200만달러였다. 하지만 최저액과 최고액 차이는 매우 컸다. 가장 적은 보상금은 25만달러, 가장 많은 보상금은 700만달러로, 어떤 희생자의 생명에는 다른 희생자의 거의 30배의 가치가 매겨졌다. 이렇게 큰 차이가 난 것은 ‘가격표’가 경제적 가치, 즉 희생자의 기대 소득에 의해 결정됐기 때문이다. 사고 당시 연간 소득이 2만달러가 되지 않았던 최저 소득 계층의 보상금 평균은 100만달러를 넘지 않은 반면, 연간 소득이 22만달러가 넘는 희생자의 보상금 평균은 400만달러에 이르렀다. 직장에 다니는 대신 집에서 자녀와 부모를 보살핀 여성 희생자들은 남성보다 경제적 가치가 더 낮은 것으로 계산됐다. 보수는 적더라도 공익에 더 기여하는 직업에 종사한 사람들도 불리했다.

민사소송에서 손해배상금이 정해지는 방식도 9·11테러 보상금과 유사하다. 불법행위로 인한 사망 사고 소송의 손해배상은 경제적·비경제적·징벌적 손해배상으로 나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경제적 손해배상이다. 이는 희생자가 죽지 않았다면 유가족에게 제공했을 모든 형태의 ‘재정적 기여’에 대한 배상을 의미한다. 그 결과 재정적 기여가 크지 않은 아이, 노인, 장애인 등의 경우에는 배상금이 적거나 심지어 지급되지 않는 경우까지 생겨난다. “이런 결론은 많은 이들이 보기에 공정성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기본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미국의 형사제도는 생명을 동등하게 다루고 있을까? 미국에서 사형이 합법인 주는 31곳이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사형은 희생자가 백인이고 가해자가 흑인인 경우에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전국적으로 사형선고율이 제일 높은 경우는 흑인 피의자가 백인을 살해했을 때였고, 그 다음은 백인 피의자가 백인을 살해했을 때였다. 가장 낮은 경우는 흑인 피의자가 흑인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무고한데 부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도 흑인이 백인보다 7배가량 높았다. 지은이는 “사법제도의 두 축, 민사 제도와 형사 제도 모두 모든 생명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그에 따라 동등한 보호를 제공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고 말한다.

노동에 대한 보상은 생명 가격표에 관한 논의에서 매우 중요하다. 민사소송이나 9·11테러 보상금 결정에서 볼 수 있듯 소득 수준은 생명 가치 평가에서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에서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받는 급여는 그 회사 평사원이 받는 급여의 300배를 넘어가고 있다. 이런 극단적 차이는 민사소송과 같은 상황에서 그들에게 매겨지는 생명 가격표가 크게 달라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성과 인종에 따른 임금격차도 마찬가지다.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임금은 비슷한 자격과 경력을 가지고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남성보다 10% 정도 낮다. 흑인 노동자는 백인보다 25~30%가량 적다. 따라서 여성이나 흑인의 생명가치는 남성이나 백인보다 낮게 평가된다. 배상금을 결정할 때 성과 인종에 따른 조정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지은이는 “생명 가격표는 경제, 법, 정책, 인간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며, 젠더,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며 “노인보다는 청년의 생명이, 가난한 이보다는 부자의 생명이, 흑인보다는 백인의 생명이, 외국인보다는 미국인의 생명이, 낯선 이보다는 가족의 생명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생명 가격표를 산출하는 데 쓰이는 방법이 절대적으로 객관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며 “생명에 가격이 매겨질 때 우리는 반드시 그 가격표가 공정하게 매겨지도록, 그래서 인권과 생명이 언제나 보호되도록 애써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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