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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너는 내 몸이 싫어?

등록 2021-08-06 04:59수정 2021-08-06 09:24

[한겨레Book]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그녀의 몸과 타인들의 파티
먼 마리아 마차도 지음, 엄일녀 옮김문학동네(2021)

목에 녹색 리본이 달린 여자가 있다. 여자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 원하는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지만, 남편이 자신의 리본에 손을 대는 일만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리본의 정체를 숨기는 이유가 뭐냐고 화를 내는 남편에게 여자는 말한다. “숨기는 게 아냐. 이건 그냥 당신 게 아니라고.” 여자의 주변에는 발목에 붉은 리본이 달린 여자도 있고 손가락에 옅은 노란색 리본이 달린 여자도 있다. 여자의 눈에 여자들의 몸 어디엔가 감겨 있는 리본은 풍경처럼 당연해 보이지만, 남편은 여자와 꽤 오랜 시간을 함께했음에도 끝내 리본을 향한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다.(‘예쁜이수술’)

언젠가부터 여자들의 몸이 점점 투명해지다가 완전히 사라지는 일이 발생한다. 여자들이 공기처럼 사라지지 않으려면 아름다운 드레스에 자신의 몸을 꿰매는 수밖에 없다. 드레스 가게에서 일하는 ‘나’는 드레스를 가게까지 배달하는 여자 페트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어느새 페트라의 몸도 서서히 투명해지고 ‘나’는 그 모습을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어느 날 ‘나’는 투명한 여자들의 몸을 풀어주려고 드레스의 꿰맨 부분을 가위로 자른다.(‘현실의 여자들은 몸이 있다’)

위절제수술을 받은 여자가 있다. 여자의 세 언니도 이 수술을 받고 날씬해졌다. 여자는 오래전 어머니처럼 모든 음식을 잘게 잘라 딱 여덟 입만 먹는다. 여자의 수술을 못마땅해하는 딸은 ‘엄마가 왜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딸은 ‘엄마의 예전 몸이랑 똑같이’ 생긴 자신의 몸을 엄마가 싫어할까 두렵다. 몸을 둘러싼 자기혐오는 엄마에게서 딸에게로, 또 그 딸에게로 대물림된다. 여자는 스스로 없애버린 ‘자신의 일부’가 유령처럼 집 안을 배회한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어릴 때의 딸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것을 발견한 날, 여자는 그것을 마구 발길질하며 지하실에 가둬버린다.(‘여덟 입’)

카먼 마리아 마차도는 에스에프(SF)와 호러, 스릴러, 판타지, 우화, 괴담 등의 영역을 거침없이 교차하면서 8편의 단편소설을 한 권에 담아냈다. 여성의 성적 욕망과 몸의 가변성, 젠더 불평등, 여성 신체의 대상화, 몸에 대한 통제의 욕망과 허상 등의 소재는 유려한 환상 기법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사실성을 획득한다. 소설 곳곳에서 여성의 몸은 욕망하고 욕망당하고, 통제하고 통제당하며, 희미해지다 영영 사라지고, 폭력과 자기혐오의 대상이 된다. ‘여덟 입’에서 화자의 딸은 “엄마는 내가 싫어?”라고 묻지 않고 “엄마는 내 몸이 싫어?”라고 묻는다. 그러나 화자는 “난 너를 사랑해”라고 대답할 뿐 끝내 ‘난 너의 몸을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는다.

소설은 여성의 몸이 겪는 다양한 일과 현상을 그리는 동시에 여성의 몸을 대하는 세계의 방식과 태도를 꼼꼼히 묘사한다. 독창적이고 기괴하며 전복적인 이야기들이 먼 환상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꽤 가까운 사실성을 획득하는 이유는 그만큼 현실과 세계가 지독하게 비틀려 있다는 뜻이리라. 재미있으면서 불편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슬프고 낯설면서 익숙한 이야기들을 다 읽고 나면 ‘여덟 입’의 딸처럼 자문하고 ‘예쁜이수술’의 화자처럼 자답할 수도 있겠다. 너는 내 몸이 싫어? 이건 그냥 내 거야. 소설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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