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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치욕의 역사’ 부단한 성찰 끝에 생성의 뿌리를 찾았다

등록 2021-08-02 04:59수정 2021-08-02 16:15

[거대한 100년, 김수영] ⑪ 전통
시인으로서의 출발은 전근대에 대한 부정
과거와 현재 변주…인간과 사랑 써내려가
김수영 시 ‘현대식 교량’ 육필 초고 첫 장.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김수영 시 ‘현대식 교량’ 육필 초고 첫 장.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고색창연한 치욕의 전통

김수영은 지극히 전통적인 사람이었다. 1921년 종로 2정목 158번지라는 사대문 안 중심가에서 태어났고, 전통의 문자인 한자를 숙련하였으며, 명절 때마다 동묘를 찾아 절을 올렸다. 손위로 형과 누이가 이름도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에 8남매의 장남이 되었다. 여동생 김수명의 전언에 따르면 할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한 김수영은 몸이 약했고, 모친 안형순은 아기 울음소리가 할아버지 계신 사랑채에 들릴까 봐 김수영을 포대기에 싸서 달랬다고 한다. 여러모로 전통적 배경에서 자아와 세계관이 형성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시인으로서의 출발 단계에서 김수영은 전통적 소재에 길든 체질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전통에 대한 그의 정서는 부정적이었다. 등단작 ‘묘정의 노래’(1945)에서 화자는 신비한 시선으로 전통의 사당을 묘사한다. 고색창연한 분위기 속에서 “잠드는 얼”을 느끼는 영적 체험이 각인되어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김수영은 ‘나의 처녀작’이라는 부제가 달린 산문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1965)에서 이 작품을 <예술부락>에 수록했던 과거를 후회한다. 어린 시절 외경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동관왕묘에서 이미지를 따와 유창한 말솜씨로 그렸지만, “불길한 곡성”만이 배경음으로 흐를 뿐이지 의미 없는 시가 되고 말았다는 푸념이다. ‘묘정의 노래’로 인해 주변 모더니스트들에게 수모를 당했으며, 급기야 그것을 마음의 작품 목록에서 지워버리기까지 했다.

전통 혹은 전근대적인 것에 대한 부정적 자의식은 ‘아버지의 사진’(1949)이나 ‘더러운 향로’(1954) 등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된다. 한편 표면적인 반감의 정서와 더불어 복잡한 의미망이 엮이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테면 ‘광야’(1957)에서의 전통은 “시인이 쏟고 죽을 치욕의 역사”와 같은 식으로 표현된다. 거기에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나”를 양립시킨다. 그런 자아를 “나의 육체의 융기”라는 과장된 포즈로 재차 강조하였다. 치욕적 역사인 전통일지라도 그 안에서 개인의 입지가 올곧아야 한다는 다짐으로 보인다. 이처럼 전통은 불완전한 시간이요 결여의 대상이면서, 바로 보아야 할 역사요 삶의 태도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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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계> 1960년 3월호에 발표된 김수영 시 ‘파리와 더불어’. 맹문재 제공

운명의 변곡점들

김수영은 고도 한양이 식민지 수도 경성으로 재구조화되는 현장에서 성장했다. 유구한 전통의 거리가 수탈을 위해 자본화되는 과정 중 그의 가세도 기울어 갔다. 한국전쟁으로 인해서는 극적인 고초를 겪게 된다. 포로수용소에 갇힌 민간 억류인은 제도적 폭력 앞에 발가벗겨진 존재였으리라. 상처를 딛고 지식인으로 성숙해 가며 4·19를 맞았다. 혁명의 열기가 군부 권력으로 귀결되는 모순을 곱씹었을 것이다. 한-일 기본조약을 전후한 이른바 ‘1965년 체제’는 더더욱 복잡한 동아시아 구도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한·미·일 안보 공동체의 공고화 속에서 베트남 파병을 실행하는 호전적 국면이 이어졌다.

숨 가쁘게 전개된 현대사 고비들은 예민한 지식인의 내면을 깊이 침잠시켰고, 사유의 폭은 더욱 확장되었다. 일련의 변곡점들에 대한 김수영의 인식이 작품에 잘 나타난다. 1960년에 작성된 것만 하더라도 미국과 소련으로 상징되는 외세에 대한 비판과 제3세계의 발견(‘가다오 나가다오’), 본격화된 재일조선인 북송에 대한 민감한 반응(‘나가타 겐지로’), 언론 자유의 상징으로 이북에 대한 상찬(‘허튼소리’)과 그 불온함의 절정(‘“김일성만세”’) 등을 볼 수 있다. 전통에 관한 형상화도 질적 전환을 이룬다. 김수영은 ‘전통’ 자체를 시적 대상으로 직접 호명하면서 그에 의미를 부여한다.

같은 해에 발표된 ‘파리와 더불어’는 흥미로운 사례에 해당된다. 이 작품은 김수영 시가 완성되고 마감된 1960년대 첫머리에 등장하는데, 문명과 전통이 직접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일과를 전폐해야 할/ 문명”은 매일 화자를 괴롭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 괴로운 대상은 아닌데, 화자가 “아직 건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화자를 치유하는 근거로 “새처럼 겨우 나무 그늘 같은 곳에/ 정처를 찾”은 전통이 등장한다. 문명에 의해 점차 밀려나는, 설움의 대상이자 소극적 존재로서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전통은 마치 최후의 보루와 같아서 “거대한 비애”이자 “거대한 여유”의 견인차가 된다. 치욕의 대상이었던 전통을 거대한 치유의 기원으로 삼게 되었으니 양질 전화의 순간이라 할 만하다.

김수영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부인 김현경 여사가 정서한 원고 첫 장. &lt;김수영 육필시고 전집&gt; 갈무리
김수영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부인 김현경 여사가 정서한 원고 첫 장.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 갈무리

김수영이 전통을 긍정하는 맥락에는 소시민의 위상에 대한 확신이 연동되어 있다. 위에서 ‘파리’의 발견이 이를 시사한다. 파리는 사소함의 대명사일 텐데, 그러나 “소리 없는 소리”와 “죽어 가는 법”을 알기에 결코 하찮은 미물이 아니다. ‘무언의 소리, 죽음으로의 이행’은 ‘보이지 않는 가치, 존재의 운명’을 비유한다. 김수영에게 파리는 엄청난 역설의 존재인 셈이다. 소시민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파리처럼 작은 개체이지만, 존재의 운명을 체현한 거대한 주체이기도 하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에서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는 자학은 소시민의 무기력을 대변한다. 하지만 비루한 저항일지라도 솔직히 드러내는 자기반성의 태도가 중요하다. 이는 “옹졸한 나의 전통”이지만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와 같다. 이때의 전통은 문명과 결합된 현재라는 점에서, 또한 주변 자연물과의 생태적 존재론을 개방하는 계기라는 점에서 박제된 전통과 다르다.

그 밖에도 1960년대 김수영 시는 전통이 현재화되는 양상을 다채롭게 변주한다. ‘현대식 교량’(1964), ‘미역국’(1965), ‘이 한국문학사’(1965) 등에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공존하며, 전통적 감각이 미래의 정서를 보완하고 있다. 김수영은 이러한 단상들 속에서 스스로를 지양하며 “어제의 시”(‘시’, 1964)를 다시 써 나갔다.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 육필 초고 첫 장. 김현경 제공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 육필 초고 첫 장. 김현경 제공

전통, 혹은 영원할 인간과 사랑

전통이라는 개념이 사상, 관습, 행동 따위의 양식을 총괄하는 광범위한 범주인 만큼 김수영 시에도 다양한 추상이 망라된다. 그는 ‘거대한 뿌리’(1964)에서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고 단언하였다. 이어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쩡쩡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는 진단이 이어진다. 전통은 확연한 긍정이요 나아가 사랑이자 인간 자체가 되었다. 말년에 작성된 ‘꽃잎’(1967)은 자유와 혁명의 이행을 꽃의 생리에 빗댄 걸작인데, 여기서도 “대대로 물려받은 음탕한 전통”은 ‘나’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로 강조된다. 언어의 본질에도 전통이 개입한다. 산문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1966)에서 그는 “어중간한 비극적인 세대”이기에 신구 언어의 감각을 체화하지 못하였노라 썼다. 언어는 민중의 생활 변화를 반영하고, 진정 아름다운 말은 시 속에서 살아 있는 낱말이라고 믿었다. 일상의 불완전한 언어를 보완할 시적 언어의 비전이 전통을 통해 도출되는 흔적이다.

전통과 문명을 대비하며 근대성을 천착하는 방식은 서구 모더니즘의 지적 관성이기도 하다. 김수영 역시 시인으로서의 이력 내내 전통에 관해 성찰하였다. 이런 태도를 이해하게 하는 또 다른 단서가 김수영 스스로 “내 시의 비밀”(‘시작 노트 6’)이라고 적었던 ‘번역’이라는 계기이다. 그중 하나인 ‘아마추어 시인의 거점’(1958)은 미국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에 관한 평론인데, 위대한 시인은 순수하지만 전문가이며 동시에 총체적(total)이어야 한다는 문장이 들어 있다. 좋은 시는 아마추어적 형식에 특이한 내용을 체현해야 하고, 이는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것이라는 논지이다. 문학의 본질 속에 전통이 내재되어 있고, 그것을 일상적 언어와 고유한 내면으로 승화해야 한다는 입장은 김수영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김수영의 생애에 각인된 구습을 오늘날의 윤리 감각으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인간 김수영은 가부장의 권위에 찌든 전형적 ‘꼰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시로써 변주한 전통은 고유하고도 미적인 가치이지 않을까. 그는 시 속에서 적나라하게 자신을 까발렸고, 전통을 현재화하며 새로운 문학사의 지평을 모색했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인간과 사랑에 대한 신뢰의 언어가 시대를 거슬러 우리를 공명케 한다. 이런 생성이야말로 김수영식 전통의 미덕임이 분명하다.

남기택 교수.
남기택 교수.

남기택 강원대 교수 문학평론가

거대한 뿌리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 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 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强者)다

나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 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 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Isabella Bird Bishop. 영국의 여행가, 작가, 지리학자.

**보신각의 다른 이름.

***가마꾼.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초상. 위키미디어코먼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초상. 위키미디어코먼스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에 “인경전”이라 나오는 보신각의 옛 동종. 위키미디어코먼스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에 “인경전”이라 나오는 보신각의 옛 동종. 위키미디어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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