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100년, 김수영] ⑪ 전통
시인으로서의 출발은 전근대에 대한 부정
과거와 현재 변주…인간과 사랑 써내려가
시인으로서의 출발은 전근대에 대한 부정
과거와 현재 변주…인간과 사랑 써내려가
![김수영 시 ‘현대식 교량’ 육필 초고 첫 장.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김수영 시 ‘현대식 교량’ 육필 초고 첫 장.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95/420/imgdb/original/2021/0801/20210801502522.jpg)
김수영 시 ‘현대식 교량’ 육필 초고 첫 장.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고색창연한 치욕의 전통
![<사상계> 1960년 3월호에 발표된 김수영 시 ‘파리와 더불어’. 맹문재 제공 <사상계> 1960년 3월호에 발표된 김수영 시 ‘파리와 더불어’. 맹문재 제공](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730/517/imgdb/original/2021/0801/20210801502519.jpg)
<사상계> 1960년 3월호에 발표된 김수영 시 ‘파리와 더불어’. 맹문재 제공
운명의 변곡점들
![김수영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부인 김현경 여사가 정서한 원고 첫 장.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 갈무리 김수영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부인 김현경 여사가 정서한 원고 첫 장.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 갈무리](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17/730/imgdb/original/2021/0801/20210801502518.jpg)
김수영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부인 김현경 여사가 정서한 원고 첫 장.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 갈무리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 육필 초고 첫 장. 김현경 제공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 육필 초고 첫 장. 김현경 제공](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95/842/imgdb/original/2021/0801/20210801502517.jpg)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 육필 초고 첫 장. 김현경 제공
전통, 혹은 영원할 인간과 사랑
![남기택 교수. 남기택 교수.](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400/500/imgdb/original/2021/0801/20210801502521.jpg)
남기택 교수.
거대한 뿌리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 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 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强者)다 나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 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 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Isabella Bird Bishop. 영국의 여행가, 작가, 지리학자. **보신각의 다른 이름. ***가마꾼.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 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 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强者)다 나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 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 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Isabella Bird Bishop. 영국의 여행가, 작가, 지리학자. **보신각의 다른 이름. ***가마꾼.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초상. 위키미디어코먼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초상. 위키미디어코먼스](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640/851/imgdb/original/2021/0801/20210801502513.jpg)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초상. 위키미디어코먼스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에 “인경전”이라 나오는 보신각의 옛 동종. 위키미디어코먼스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에 “인경전”이라 나오는 보신각의 옛 동종. 위키미디어코먼스](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640/960/imgdb/original/2021/0801/20210801502523.jpg)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에 “인경전”이라 나오는 보신각의 옛 동종. 위키미디어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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