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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삶의 여행자에게

등록 2021-07-23 08:59수정 2021-07-23 09:49

[한겨레B] 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살림 비용
데버라 리비, 이예원 옮김/플레이타임(2021)

새벽녘, 케이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스무살 케이는 동물권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는데, 갑자기 미래가 불안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지금 가는 방향이 맞는지 자신이 없어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나는 케이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당신도 나처럼 불안했나요?’

케이에게 답장을 보냈다. “저는 케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보길 응원해요. 미래는 예측할 수 없어서 아무리 과거를 돌아봐도 그곳에 답이 있진 않더라고요. 케이가 누구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집중하면 그 과정이 조금은 든든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덧붙여, 케이에게 책 한 권을 추천했다. “<살림 비용>을 추천하고 싶어요. 푸르스름한 어둠으로 길을 잃은 작가의 여정이 저에겐 힘이 되었거든요.”

데버라 리비의 자전적 에세이 두 번째 책인 <살림 비용>은 50대인 작가가 이혼 뒤에 방랑하듯 살아가는 일상을 담은 책이다. 리비의 삶에는 새로운 국면이 찾아온다. 어머니는 죽고, 결혼 생활은 끝났다. 어머니라는 삶의 내비게이션과 가정이라는 반짝이는 반지를 등진 채로 리비는 길을 잃는다. 책의 첫 문장은 이렇다. “오슨 웰스가 일러주었듯 해피 엔딩인지 아닌지는 어디서 이야기를 끊느냐에 달려 있다.”

리비는 일종의 ‘삶의 사건’ 이후, 이야기를 불행이나 행복으로 간단하게 결론짓지 않고 차분하게 여정을 들려준다. 이혼은 ‘누군가의 와이프’라고 불리던 여자가 자기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하면서도, 매일 날아오는 청구서 앞에서 움찔대며 닥치는 대로 일해야만 하는 고단함을 토로한다. “내 새 삶은 어둠 속에서 열쇠를 더듬어 찾는 행위로 요약됐다. 삶은 고달팠고 내겐 대본조차 없었다.”

그 여정에는 글을 쓸 공간을 마련하는 과정도 있었다. 리비는 부엌과 테라스를 전전하다가 친구의 낡은 헛간을 빌려 자기만의 글방을 마련한다. 당장의 생활을 위해 삶을 쓰고, 원고료로 삶을 지탱한다. 글을 쓰면서 불확실한 미래를 견딘다. 월세와 생활비 때문에 종종거리다가도 이것도 자유의 한 단면이라고 말하며 여유를 부리기도 한다. 때로는 70대가 된 자기 모습을 상상하며, 캘리포니아의 수영장이 딸린 집에서 타자를 치는 자신과 그 주위를 둘러싼 파릇파릇한 열대 식물을 그린다. 그녀는 단단하게 길을 잃은 사람. 길을 잃은 뒤 시작된 여행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 내 집에서 오늘도 쓰고 또 산다. 나로 존재하기 위해 날마다 분투하면서.”

나는 이 책을 모든 게 흐릿했던 10대의 나, 이리저리 휘둘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20대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에게 건네주고 싶다. ‘너는 분명 매번 길을 잃을 거야. 예측 가능한 삶이란 불가능하니까. 갑작스러운 상실이 다가와도, 길을 잃어도 삶이 위축되기만 하진 않을 거야. 혼란에서 시작되는 여행을 함께할 친구가 여기 노란색 표지 안에 있어.’ 나는 삶의 여행자 케이에게 든든한 여행 친구를 소개하고 싶었다. 케이가 케이로 존재하기 위해, 우리가 우리로 존재하기 위해, 날마다 분투하는 일상을 함께할 친구가 이곳에 있어요. 집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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