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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마르크스 이론은 ‘피와 살’ 지닌 인간에서 시작했다

등록 2021-07-09 05:00수정 2021-07-09 09:54

‘해방철학’ 창시자 엔리케 두셀, 마르크스 경제학 초고에 주석
체제 내부 총체성 아닌 외재성·타자 핵심 삼아 독창적 접근

미지의 마르크스를 향하여: <자본> 1861~63년 초고 해설
엔리케 두셀 지음, 염인수 옮김/갈무리·2만5000원

라틴아메리카 ‘해방철학’의 창시자로 꼽히는 엔리케 두셀(87)이 카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작업을 파고들어 자신만의 사유로 읽어낸 책 <미지의 마르크스를 향하여>가 국내에서 출간됐다. 두셀은 월터 미뇰로, 아니발 키하노 등과 함께 서구 중심주의에서 벗어난 탈식민주의 논의를 이끈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철학·역사학·신학 등 분야에서 71권의 방대한 저서를 집필한 철학자다. 다만 국내에선 <해방철학>(1977) 등 그의 핵심 저작들이 아직까지 소개되지 않은 상태다.
1875년께 찍은 마르크스의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1875년께 찍은 마르크스의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아르헨티나 출신인 두셀은 유럽 유학 과정에서 “유럽 철학을 도구로 삼되, 자신의 고유한 전통을 알고 현실을 인식하도록 요구”해야 함을 깨달았고, 이를 위해 억압된 자를 감추는 기존 철학을 파괴하는 철학으로서 해방철학을 구축하는 데 나섰다. 1980년대에 그는 독일 베를린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오가면서까지 마르크스의 초고 전체를 파고들었고, 그 결과물을 세 권의 책으로 냈다. <미지의 마르크스를 향하여>는 마르크스가 1861~63년에 쓴 원고에 대한 주석으로, 1988년 스페인어로 처음 출간됐다. 해당 원고들이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EGA)으로 70년대 말부터야 처음 출간됐던 것을 감안하면, 선구적인 작업이었다. 옮긴이 염인수 고려대 교양교육원 연구교수는 두셀이 마르크스 초고 연구를 통해 “자신의 사유에서 현상학적, 해석학적인 것을 경제적인 것, 정치적인 것과 결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디딤돌 삼아 <해방윤리>(1998), <해방정치1>(2007), <해방정치2>(2009)에 이르게 됐다고 짚는다.

<미지의 마르크스를 향하여>, 곧 ‘1861~63년 초고’(이하 ‘초고’)에 대한 연구는, 마르크스 과학이 현존 체제가 작동하는 ‘총체성’을 ‘비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고 보고 마르크스가 이를 위해 경제학이 상정해둔 범주들을 허물고 잉여가치, 생산가격 등에 대해 자신만의 범주를 만들어내기 위해 분투한 궤적을 드러내어준다. 무엇보다 두셀은 ‘헤겔의 영향을 받아 총체성을 사유하고 변증법적 방법론을 썼다’는 기존 풀이와 다르게, 마르크스는 “만년의 셸링의 계승자”이며 그의 사유는 총체성 너머에 있는 ‘타자’로부터, 곧 ‘외재성’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했다. 헤겔은 존재가 자기 자신의 전개로 본질에 이른다고 봤으나 셸링은 존재의 원천이 존재 바깥, 외부에 있다고 봤다. 이에 따라 두셀은 마르크스의 방법론이 헤겔처럼 동일자 내부의 자기전개에 해당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셸링처럼 동일자 밖 절대적 타자로부터 출발하는 ‘초(超)변증법’이라고 본다. 타자에 대한 두셀의 사유에는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영향도 짙게 배어 있다.

‘해방철학’을 주창하는 라틴아메리카 사상가 엔리케 두셀. alchetron 누리집 갈무리
‘해방철학’을 주창하는 라틴아메리카 사상가 엔리케 두셀. alchetron 누리집 갈무리

두셀은 자본이라는 총체성에 포섭되기 이전 노동자의 ‘산 노동’을 논의의 핵심으로 삼고, 그 외재성이 바로 마르크스 이론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대상화된 노동의 유일한 반정립은 대상화되지 않은 ‘산 노동’으로, 이것이야말로 가치를 창조하는 활동”이라고 썼다. 두셀의 논의를 단순화해 말해보면, “가치를 창조하는 원천”인 노동자와 그의 ‘산 노동’은 자본이라는 총체성 바깥에 있기 때문에 애초 “아무것도 아니다.” 자본은 ‘산 노동’을 임금으로 교환가능하도록 대상화하고 포섭함으로써 잉여가치를 창출하는데,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인간이 불평등한 조건으로 스스로를 팔게 만드는 본원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적 관계’다. “자본에 의한 잉여가치 생산은 가치의 창조적 원천인 외재성을, 즉 ‘산 노동’을 포섭한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이 노동은 팔리지 않으면 안 된다. 가난하기에, 이 사람은 임금 없이 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해방철학’을 주창하는 라틴아메리카 사상가 엔리케 두셀. 갈무리 제공
‘해방철학’을 주창하는 라틴아메리카 사상가 엔리케 두셀. 갈무리 제공

부르주아 경제학은 이런 본질을 도외시하고 ‘자본이 잉여가치를 만들어낸다’고 보는 등 총체성 내부에서 전개되는 일들에만 시야를 고정했을 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총체성 바깥에 있는 타자, 곧 실제적 인격으로서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의 외재성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외양”에만 머문 부르주아 경제학을 비판하고 “본질”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이 두셀의 지적이다. 부르주아 경제학에서 말하는 잉여가치나 이윤 등 모든 가치의 본질은 “‘산 노동’, 곧 인간 활동이 대상화된 것에 불과하다.” 이 같은 두셀의 사유는 마르크스 이론으로부터 자본주의에 대한 윤리적인 비판까지 이끌어낸다. 외재성을 시야에 넣지 못하고 자본주의의 총체성에만 기댄 도덕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평등한 교환 관계’로 볼 뿐이다. 그러나 이윤, 지대, 이자 등 부르주아 경제학이 말하는 갖가지 잉여가치들의 원천은 결국 ‘산 노동’을 대상화하고 잉여노동을 축적한, 곧 ‘도둑질’한 결과물이다. 타자라는 실체적 인격을 잉여가치를 착출하는 수단의 자리에 놓는 것 자체가 비윤리적이다. 두셀은 “마르크스가 보기엔, 의심할 여지없이, 순진한 유물론과는 반대로 윤리적 관계가 생산 관계를 결정하고 또 구체적으로 편성한다”고 짚는다.

두셀은 마지막 두 개의 장에서 각각 ‘초고’와 해방철학 및 “종속 개념”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기도 하는데, 이는 유럽 중심의 마르크스주의와 비판적으로 대면했어야 하는 그의 지리적 위치를 잘 드러내어준다. 두셀은 총체성의 범주에 갇혀 ‘경제적인 것’에 대한 논의에만 머물러온 마르크스주의에 외재성의 범주를 도입함으로써, 중심부와 주변부를 아울러 전지구화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해방의 이론과 실천을 제안했다. 책을 쓸 당시의 두셀과 현재 우리 사이의 시간·공간의 거리는 그리 가깝지 않지만, ‘미지의 마르크스’로부터 ‘미래의 마르크스’를 발견해야 할 필요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체제 내부의 총체성이 아닌 외재성과 타자를 핵심으로 삼는 그의 접근은 여전히 이를 위해 핵심적인 자원이 될 수 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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