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팬데믹을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유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북하우스·1만6000원
오피니언 부문 담당자로서, <한겨레> 정기 칼럼니스트 130명 가운데 업무 대비 최적의 필자를 애써 꼽자면 한 명은 슬라보이 지제크(슬라보예 지젝·사진)이겠다. 논지가 선명하다. 논거로 곧잘 쓰는 특유의 비유는 깊은 우물 속 같고 길어 낸 글맛도 심심칠 않다. 지제크는, 매체가 피할 수 없는 허나 때로 곤란해지는 칼럼 주제로서 (옹호든 비판이든) 문재인 정부를, 대선 주자를 다루지 않는다. 검찰개혁, 조국 사태도 언급한 적 없다. 슬로베니아 철학자니 당연하질 않냐고? 요는, 그럼에도 그의 글은 첨예하고 긴히 한국인이 당면한 문제를 다룬다는 거다.
코로나 팬데믹 복판에서 내놓은 책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에서 보듯, 지제크의 질문은 이런 식이다. 격리와 봉쇄 정책이 ‘삶’을 ‘생존’으로 축소시키므로 반대한다는 말은 옳은가, 이러한 자유는 노동자에게 이익인가, ‘마스크’를 반대하며 시위하는 대개의 포퓰리즘적 뉴라이트는 어떻게 일부 급진 좌파와 조응하는가, 뭐든간 팬데믹은 착취된 자연의 보복 아닌가, 도대체 이 판국에, 그레타 툰베리와 버니 샌더스는 어디로 사라져버렸나?
위중의 시대 바깥에 한국이 있지 않고, 다분히 특정 인물을 넘어 기후재앙의 ‘시대’와 금융자본주의 ‘사회’에 맞선 포괄적 전망의 부재를 경고하는 것처럼 그의 어떤 질문도 한국의 밖에 있지 않다.
질문을 사유하는 데 있어 세 가지 전제가 보인다. 첫째, 마치 팬데믹이 뱉어낸 것들 같으나 기실 다 오래된 질문이다. 팬데믹은 이미 내재해온 긴장들을 폭발시킨 뇌관(트럼프처럼)일 뿐이다. 둘째, 팬데믹은 향후 지향할 사회에 대한 각 전망들이 지구적으로 충돌하게 하거니와, 막상 재앙에 맞선 연대보다 대결이 가열되는 사태(미국과 중국처럼)를 목도하게 한다. 셋째, (그래서) 진짜 위기는 봉쇄·격리가 아니라 우리가 다시 움직일 때(미국과 중국에 낀 한국처럼) 온다.
책엔
지난 2월치 <한겨레> 칼럼 꼭지뿐만 아니라 다른 꼭지에서의 유사한 논거들도 담겨 있다. 일찍이 ‘마스크’를 반대하는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시를 지제크(과거 둘은 같은 책을 쓰기도 했다)는 비튼다. “의료의 이름으로 자유를 폐지한다면, 결국 의료도 폐지될 것이다. 삶의 이름으로 인간적인 것을 폐지한다면, 결국 삶도 폐지될 것이다.”(아감벤) - “자유의 이름으로 의료를 폐지한다면, 결국 자유도 폐지될 것이다. 인간적인 것의 이름으로 삶을 폐지한다면, 결국 인간적인 것도 폐지될 것이다.”(지제크) 책에서의 번역은 좀 다르니 비교해볼 만하다. 또한 사유의 경로가 될 것이다.
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