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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여주고 재워줄게…집밖 청소년에 뻗치는 ’검은 손길’

등록 2020-12-09 04:59수정 2020-12-09 09:51

‘그루밍’ 성범죄에 노출된 집밖 청소년들
“법적 지원기반과 자립체계 만들어야”
부산 부산진구 서면의 한 오락실에서 경찰관이 청소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가정 밖 청소년들이 모이는 곳이다. 부산지방경찰청 제공
부산 부산진구 서면의 한 오락실에서 경찰관이 청소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가정 밖 청소년들이 모이는 곳이다. 부산지방경찰청 제공
부산에 사는 영희(가명·13)는 2016년 부모가 이혼한 뒤부터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홀로 생계를 꾸리는 어머니는 날마다 늦은 밤 귀가했고, 영희를 전남편에게 보내려고 했다. 모녀간 대화는 없었다. 영희는 학교에서도 겉돌았다.

2018년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영희는 어느 날 6학년 선배가 알려준 부산진구 서면의 대형 오락실 ㅅ게임랜드에 갔다. 그곳에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있었다. 영희는 이들과 어울리면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이후 일주일에 두세차례는 집을 나와 친구들의 자취방이나 모텔을 전전했다. 또래들과 알고 지내며 종종 용돈을 주던 원아무개(20)씨를 알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원씨가 돌변한 것은 1년여 만이었다. 지난해 12월 영희 등과 함께 사하구 장림동의 한 모텔에서 술을 마시던 원씨는 영희를 다른 객실로 불러내더니 성관계를 요구했다. 영희는 거부했지만 “같이 지내는 친구를 죽을 정도로 때리며 괴롭히겠다. 가출도 잦았으니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협박에 저항할 수 없었다. 원씨는 이후 “돈을 벌 수 있는 성매매를 하자”고 제안했고, 견딜 수 없었던 영희는 그를 피해 다녀야 했다.

원씨를 피하느라 결석이 잦았던 영희를 학교가 학업중단 위기 학생으로 분류하고 전문기관에 상담을 의뢰했고, 영희는 상담에서 이런 사연을 털어놨다. 지금 한 청소년 보호시설에서 중학교 입학 검정고시를 준비 중인 영희는 네일아트도 배우고 있다. 보호시설 관계자는 “영희는 지금도 길을 가다 20대 남성과 마주치면 몸을 떤다. 겉으로는 씩씩해 보이지만, 여전히 상처가 크다”고 말했다.

중학교 2학년인 초록(가명·14)이는 성적 문제 탓에 어머니와 갈등을 겪다 지난 9월 가출했다. 이틀 동안 부산진구 서면의 노래방과 피시방을 전전했다. 돈이 떨어지자 잘 곳이 없었다. 페이스북으로 알게 된 한 언니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면 돈도 벌고 잘 곳도 마련된다고 했다. 노래방에서 알게 된 한 오빠는 함께 모텔로 가자고 했다. 두려움에 집으로 돌아갔지만, 부모님 잔소리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잊지 못해 다시 일주일에 2~3일씩은 집에 들어가지 않는 일이 반복됐다.

초록이는 지난 9월 말, 비슷한 처지의 친구와 동래구의 한 골목에서 원씨와 그의 후배를 만났다. 원씨는 이따금 초록이에게 용돈을 주고 술, 담배를 사주던 이였다. 일행은 함께 술을 마셨고, 원씨와 그의 후배는 초록이와 친구를 해운대구 한 모텔로 데려가 성폭행하려 했다. 초록이는 화를 면했지만, 친구는 원씨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말았다.

부산 남부경찰서는 지난 10월 가출 청소년들을 성폭행한 혐의(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로 원씨 등 3명을 구속했다. 원씨 등은 지난해부터 숙박업소 등지에서 알고 지내던 가출 청소년들을 협박해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이들이 가출 청소년에게 성매매를 알선한 정황도 파악해 조사하고 있다.

가출 청소년, 그루밍 범죄에 쉽게 노출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은 2018년 기준으로 가출 경험이 있는 청소년이 전체 청소년의 3.5%를 차지한다고 추정했다. 2018년 만 6~17살 사이의 학령인구가 567만여명인 점을 고려하면, 19만8천여명이 가출 경험을 지닌 것으로 추산된다.

청소년을 집 밖으로 떠미는 가장 큰 요인은 ‘부모와의 갈등’이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펴낸 ‘2019 가정 밖 청소년 실태와 자립지원 방안 연구 보고서’를 보면 부모 혹은 가족과의 갈등이나 다툼 탓에 가출했다는 응답이 49.7%로 나타났다. 부모 등 가족과의 폭력을 피하려고 가출했다는 응답도 24.5%를 차지했다. 중·고·대학생 선교단체인 ‘에스에프시(SFC) 청소년교육센터’가 부산에서 운영하는 위기학생 학업복귀지원센터 ‘틴스토리’의 박용성 센터장은 “부모의 관심 부족으로 자식이 가출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례도 많다”며 “부모-자식의 갈등으로 가정 밖 청소년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고 말했다.

가출한 여성 청소년들은 술, 담배, 용돈 등을 주고 모텔을 잡아주는 이들에게 금세 의존하게 된다. 이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자신들이 가출했다는 사실을 알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그루밍 범죄에 쉽게 노출된다. 원씨 같은 이들은 상대가 정신적으로 길들었다고 판단하면 돌변해 성폭행이나 성매매의 가해자가 된다. 이를 거절하면 신체사진을 찍어 협박하는 경우도 있다.

탁희욱 틴스토리 사무국장은 “학교 밖 여성 청소년은 자신을 돌보는 데 취약하다. 형편없는 인간관계도 붙들고 싶어 한다”며 “이런 심리 탓에 거리에서 만난 ‘오빠’한테 성범죄 피해를 보아도 자신을 피해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한 여성 청소년은 <한겨레>에 “가출한 뒤 평소 돌봐준 오빠에게 금전 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당시에는 오빠들이 해달라는 일(성매매)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부산 사상구에 있는 한 가출팸 모습. 부산지방경찰청 제공
부산 사상구에 있는 한 가출팸 모습. 부산지방경찰청 제공
처벌 강화됐지만…사회안전망 시급 정부는 지난 5월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 처벌 기준을 강화했다. 상대방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성관계할 경우 강간죄로 처벌하는 나이 기준을 13살 미만에서 16살 미만으로 넓혔다. 아동, 청소년을 유인해 길들여 성적인 착취를 하는 그루밍 범죄를 염두에 둔 조치였다. 미성년자 성폭행 범죄는 준비나 모의만으로도 처벌하는 예비·음모죄도 신설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가출 악순환을 막고, 이들이 범죄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안전망 강화가 먼저라고 짚었다. 김희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청소년복지지원법 등 관련 법률을 개정해 지원의 법적 기반을 마련하고, 전문적·종합적 자립체계를 만들어 가정 밖 청소년을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처벌보다, 그런 환경에 노출되지 않는 사회적 환경 구축이 우선이라는 얘기다.

가출 청소년을 접하는 일선에서의 적극적인 움직임도 중요하다. 지난해 9월 아버지의 학대로 집을 나와 부산의 한 가출팸(가출 청소년의 집단생활체)에서 지내던 지영(가명·18)이는 경찰에 구조돼 보호시설에서 학업에 복귀했다. ‘위기청소년 맞춤 선도 지원책’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 부산지방경찰청은 전담경찰관을 둬 지영이와 일대일 상담을 진행하고, 지난 3월 난소염으로 병원에 입원하자 지자체 등과 함께 치료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등록도 도왔고, 지영이는 내년 2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다. 올해 부산에서만 경찰이 이 프로그램에 따라 지자체, 청소년보호시설 등 기관과 손잡고 청소년 82명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주연 부산진서 여성청소년계 학교전담경찰관은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돌봐야 한다’는 말처럼 가정 밖 청소년 문제에 지역사회가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보살핌과 체계적 지원 등에 힘을 모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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