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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과 광주 5·18민주항쟁은 운명적으로 연결된 사건”

등록 2020-10-21 16:27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21일 경남 사회혁신 국제포럼의 특별세션 발제자로 나서 강연을 했다. 경남도 제공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21일 경남 사회혁신 국제포럼의 특별세션 발제자로 나서 강연을 했다. 경남도 제공
“광주학살은 어쩌면 부산과 마산에서 벌어졌을지 모를 학살이 김재규의 박정희 사살이라는 변수 때문에 시간을 미루고 공간을 바꿔 일어난 것입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21일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동시에 진행된 ‘경남 사회혁신 국제포럼’의 특별세션 ‘부마와 광주, 기억·계승·참여’에서 발제자로 나와 “부마항쟁이 없었다면 광주 5·18민주항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광주에서 발생한 수많은 사상자 때문에 두 사건은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두 사건은 운명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1979년 10월 부산과 경남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항쟁과 1980년 5월 광주 5·18민주항쟁은 시기적으로는 7개월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두 항쟁에 진압군으로 투입된 부대는 모두 공수부대였고, 무자비한 진압을 펼쳤다.

그런데 부산·마산과 달리 광주에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왜 그랬을까? 한홍구 교수는 공수부대의 부마항쟁 진압 경험,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의 강경진압 방침, 강경진압에 대한 시민 반응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 진압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같은해 12·12 군사반란에서도 결정적 구실을 수행했다. 신군부는 1980년 봄이 되면 전국에서 대학생들이 시위를 벌일 것으로 예상하고, 1980년에 접어들면서 공수부대에 강도 높은 충정훈련을 실시했다. 결국 1980년 5월 공수부대는 광주에 투입됐다.

신군부는 공수부대가 부마항쟁을 성공적으로 진압했으며, 시위 초기부터 공수부대를 투입해 강력하게 진압했으면 시위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신군부는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곧바로 공수부대를 투입해 강력하게 진압에 나섰다. 결과는 신군부의 예상과 반대였다. 광주에서는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만행이 대학생과 일부 시민의 소규모 시위를 거대한 민중항쟁으로 바꾸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공수부대가 무자비한 진압에 나섰을 때 부산·마산과 광주의 상황은 매우 달랐다. 중요한 것은 시민 참여였다. 부산과 마산에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단히 격렬한 시위를 겪은 뒤 공수부대가 투입됐다. 꽁꽁 얼어붙었던 유신체제 아래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격렬한 시위를 통해 그동안의 불만을 한껏 분출한 부산·마산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강력한 진압이 시작됐을 때 이미 자신들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뒤였다. 그러나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죽은 뒤 7개월 동안 민주화에 대한 높은 기대치를 키운 광주시민들은 아직 자신들의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었다. 시위의 싹을 초기에 자르려던 신군부의 강경진압이 도를 넘어서게 되자, 시민들의 강력한 반발이라는 예기치 않은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부마항쟁과 5·18민주항쟁을 ‘미완의 항쟁’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한홍구 교수는 인정하지 않는다. 한 교수는 “부마항쟁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꿈도 꾸지 못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이었다. 그런 부마항쟁을 미완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역량을 비현실적으로 과대평가했기 때문이다. 광주 5·18민주항쟁은 부마항쟁이 거둔 성과 위에서 시작된 항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부마항쟁은 5·18민주항쟁을 낳았고, 5·18민주항쟁은 1987년 6월 항쟁을 만들어냈다.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이 계속되고, 21세기에도 촛불항쟁이 여러 차례 지속하였다는 것은 그 끈질긴 저력에 감탄할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엄청난 희생과 헌신 끝에 이룩한 민주주의 성과를 번번이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한홍구 교수는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 한국은 지금까지 방역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많은 사람은 한국의 치열한 민주화 경험, 공동체 의식과 책임감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이제 부마항쟁과 광주항쟁도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성과를 내면화해서 시민 한사람 한사람이 한국형 민주주의(케이-데모크라시)의 주체로 나서야 할 것”이라고 끝맺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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