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박근혜 정부가 강요한 간선제는 당일 아침에 추첨으로 뽑힌 50여명의 선거권자가 후보자 연설을 듣고 자료를 읽은 다음 투표하는 방식이었어요. 대학들은 이 선거제도를 로또식이라고 불렀지요.”
12일 문재인 대통령의 임명장을 받고 4년 임기를 시작한 차정인(59) 부산대 신임 총장은 대학 구성원 일부가 총장을 선출하는 간접선거를 강하게 비판했다. 직선제가 모범답안은 아니지만 간선제보다 강점이 많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2월 총장 선거에서 후보 7명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학교 구성원들이 직접 선출하는 국공립대 총장은 노무현 정부 때까지 대세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때부터 교육부의 행·재정 압력에 못 이겨 하나둘 투항을 하더니 박근혜 정부 때는 서울시장이 총장을 임명하는 서울시립대를 뺀 전국 4년제 국공립대학 40곳 가운데 부산대만 직선제를 유지했다.
부산대가 지켜낸 국공립대 직선제는 문재인 정부 출범 뒤 전국 국공립대 다수가 따라 하고 있다. 4년제 국공립대 직선 총장은 지난해 12월 기준 25명이다. 부산대 총장의 상징성이 그만큼 커졌다. 게다가 차 총장은 2015년 부산대 교수회 부회장을 맡으며 직선제 사수 투쟁을 이끌었다. 차 총장을 12일 부산대 총장실에서 만났다.
“대학 총장 직선제가 왜 필요하냐고요. 직선제는 대학 총장이 민주적 리더십을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총장선거 과정에서 대학발전 방안을 놓고 경쟁하면서 정책추진 동력이 생겨나고 대학민주주의 기반이 형성됩니다.”
부산대는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된 곳이다. 전두환 군사정권에 항거한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는 부산의 용광로 구실을 하며 6월 민주항쟁이 전국항쟁으로 번지는 데 기여했다.
부산대는 직선제 총장 사수를 위해 남다른 투쟁을 이어갔다. 부산대가 2015년 11월 직선 총장을 선출하자 박근혜 정부는 6개월 동안 임명을 하지 않았고 교육부는 전년도에 확정된 학생교육비 18억원을 삭감했다. 이에 부산대 교수 1100여명은 120만원씩을 갹출해 학생교육비를 마련했다.
차 총장은 이런 부산대 민주화 투쟁의 역사에 함께했다. 그는 1979년 부산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해 10월 부마민주항쟁이 터졌다. 하숙집에서 아침밥을 먹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단다. 집회에서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연설을 자주 했다는 이유였다. “나는 단순 참가자라고 생각했는데 경찰이 주요 인물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하.”
지난 2월 직선 선출…12일 임기 시작
엠비 정부 이후 교육부 압박으로
지난 정부 땐 부산대만 직선 총장
교수회 부회장 하며 ‘직선 사수’
“대학 민주적 절차·소통 강화할 터”
검사 4년 등 법조인 17년 경력
차 총장에게 부산대 직선 총장이 주는 무게감은 남다르다. 고 고현철 교수 때문이다. 고 교수는 2015년 8월 부산대 대학본부가 교육부의 외압에 못 이겨 직선제를 포기하려고 할 때 ‘직선제 사수’를 요구하는 유서를 남기고 대학본부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부산대 교수회는 직선제를 지키기 위해 대학본부 앞에서 천막 농성을 했다. 부산대 교수회 부회장이던 차 총장은 단식투쟁을 하던 회장을 대신해서 투쟁을 이끌었다. “고 교수와 사귀어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그일 이후에 오래 사귄 사람과 같은 느낌입니다”. 인터뷰 중간 차 총장은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고 교수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아닐까 싶었다.
지방대학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학령인구 감소와 지방고 졸업생들의 수도권 쏠림현상의 피해를 지방대학이 맨 앞에서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대는 정부가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전국 거점국립대학(9곳)이어서 다른 지방대학에 견줘 선방은 하고 있지만 위기감은 여느 지방대학 못지않다.
“수도권 집중 현상은 기형적이며 망국적입니다. 지방의 학생들이 수도권 대학으로 몰리는 것을 더 부채질하고 있죠. 지방대학 발전이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선순환의 첫 단계가 될 수 있어요. 정부가 지방대학 육성정책을 쓰는 게 올바른 해법입니다.”
그가 제시한 해법은 의외로 간명했다. 차 총장은 “지방대학들이 공공기관 취업에 유리한 학교가 되면 지역인재들이 수도권으로 가지 않고 지역학생들이 성적에 맞춰 지방대학에 진학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공공기관 지역인재 취업 할당제의 적용단위를 비수도권으로 확대하고 지방대학생의 우선 선발비율을 현재 24%에서 50%로 높일 것”을 주문했다. “현재 지방으로 이전한 공공기관의 지방대학생 우선 선발제도는 해당 지역에서만 선발하는 칸막이가 있어요. 칸막이를 없애면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비수도권 지역의 공공기관에 취업하는 기회가 더 많아집니다. 공공기관들도 지방대학생 우선 선발비율을 높이는데 부담을 덜 가집니다.”
차정인(오른쪽) 부산대 총장이 2015년 8월 고현철 교수의 죽음과 관련해 부산대 부총장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그는 당시 부산대 교수회 부회장을 맡으며 총장직선제 투쟁을 이끌었다. 부산대 제공
그는 또 “고등교육재정교부금법을 제정하고 일반회계를 증액해서 대학이 돈을 긴요한 곳에 효과적으로 쓸 수 있도록 재량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령인구 감소 때문에 발생하는 대학정원 감축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이 일정 비율씩 강제 감축해야 합니다. 대학평가를 통해서 하되 최소한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감축 비율은 안배해야 합니다. 자율 감축은 수도권 집중현상에 대해 ‘정부 정책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논문실적에 비례해 연봉을 차등하는 ‘누적식 성과연봉제’에 대해선 “논문 편수 채우기에 학자들을 몰아세워서는 노벨상과 같은 대작이 나오지 않는다. 대학의 본질은 교육과 연구다. 정부가 연구 관리에 그치지 말고 연구 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총장으로는 독특한 경력을 지녔다. 1986년 2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검사 4년과 변호사 13년 등 17년 동안 법조인 길을 걷다가 2006년 부산대 법학과 교수가 됐다.
“법조인으로 평생 살겠다고 했는데 검찰 조직문화는 체질에 맞지 않았어요. 대학은 자유로운 영혼인 나에게 맞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죠. 공부는 돈을 내고 하는데 돈을 받고 공부하는 대학교수는 혜택받은 직업이며 너무 행복한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잠시 학자의 길을 벗어나기도 했다. 2000년 16대 총선 때 창원을 지역구에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이주영(현 국회부의장) 한나라당 후보에게 졌다. 부산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을 지냈고 문재인 정부 법무부 법무검찰개혁위원회 위원과 법제처법령심사위원을 맡았다. 검사와 변호사 생활 17년의 경험을 살려 <차정인의 열린 법정>과 강의교재인 <형사소송실무>를 펴냈다. 그는 “구성원들의 기대가 커서 어깨가 무겁다”고 했다. 무엇보다 직선제를 지켜낸 학교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이 크다. “부산대는 대학 정신을 지켜왔고 시대의 요구에 부응했습니다. 한 동료를 잃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희생을 치른데 대한 회한과 아픔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그는 민주주의의 요람이자 산실인 대학의 본성에 맞게 민주적 절차와 소통을 강화하려고 한다. 교무회의에 총학생회·직원협의회·조교협의회 등 대학 구성원들이 의견서를 내면 답변하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한다. 또 총장 공관을 게스트하우스로 만들어 개방하고 국비 290억원을 들여 짓는 부마민주항쟁기념관을 부산대 안에 유치해서 시민들의 공간으로 제공할 계획이다. 또 차기 총장이 새 학기 시작 전에 보직교수를 임명하고 겨울방학 전에 총장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임기를 석 달가량 단축해 2월25일에 물러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2월 총장 선거 때 정규직 교수 전체와 조교·직원·학생 대표들이 투표권을 가졌으나 학생들은 투표반영비율(3.2%)이 낮다는 이유로 기권했다. 차 총장은 “교수회가 학생투표권 반영비율 상향을 적극 검토하기를 바란다. 부산대가 가장 좋은 총장선거제도를 가질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어깨가 무겁지만 하나씩 해나가면 뭔가 길이 열리지 않을까요”. 그가 지방대학 살리기와 학내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숱은 과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관심이 쏠린다.
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