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씨는 이달 말 대구 남구청을 상대로 장애인 등록 거부 처분 취소 행정소송에 나선다. 김규현 기자
“앞으로 얼마나 혼자 힘으로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남은 생은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요.”
지난 7일 대구시 동구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난 여운(71)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2008년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감염됐다. 꾸준히 약을 먹으면서 면역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50대 때부터 치아 손상, 시력 저하, 고관절 통증 등이 이어져 현재 병원 여섯 군데를 다닌다고 한다. 하지만 실비보험에 가입할 수 없어 의료비 부담이 크다. 에이치아이브이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보험 가입을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종합병원”이라 부르는 그는 지난 10월 대구시 남구 한 행정복지센터를 찾아 장애인 등록 신청을 했다. 하지만 센터는 장애진단심사용 진단서가 없다는 이유로 신청을 반려했다. 에이치아이브이 감염인은 장애인복지법에서 정한 15가지 장애 유형에 해당하지 않아 진단서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2021년 예외적 장애 인정 심사 절차가 마련됐지만, 이는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인정한 경우에만 심사를 받을 수 있어 여씨는 문턱 높은 이 제도를 활용할 수 없었다.
그가 ‘법적 장애인’이 되려는 이유는 노후를 위해서다. 여씨는 “우리는 일반 응급실만 가도 늘 격리당했다. 이제 나도 거동이 불편해지면 요양원에 가야 할 텐데 그곳에서 받을 차별은 너무 뻔하다. 장애 판정을 받아서 나와 동료들이 더는 사회에서 무시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지영 레드리본인권연대 대표는 “감염인들이 고령화하면서 요양과 돌봄 공백이 나타나고 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을 통해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지만 감염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기피하는 사례도 많다. 감염인들도 건강하게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예외적으로 사회적 장애인으로 인정해 장애인 활동보조서비스 등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에이치아이브이 장애인정을 위한 전국연대는 세계 에이즈의 날인 지난 1일 국민연금공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에이치아이브이 감염인 장애인 등록 신청 거부 처분 취소 행정소송에 나선다고 밝혔다. 레드리본인권연대 제공
국외에서는 에이치아이브이 감염인을 법적 장애인으로 인정하는 추세다. 일본은 1997년 에이치아이브이 감염인을 신체장애복지법에 따른 장애인으로 인정했다.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도 지난해 ‘2·3차 대한민국 국가보고서 심의에 대한 최종견해’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에 에이치아이브이 감염인을 포함하여 모든 장애를 아우르는 장애 개념을 채택해 그들의 특성과 욕구가 인정되도록 보장하라고 권고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19년과 지난해 두차례 에이치아이브이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입원이나 수술을 거부당한 사례에 대해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른 장애인 차별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여씨는 이달 말 대구 남구청을 상대로 장애인 등록 거부 처분 취소 행정소송에 나선다. 에이치아이브이 감염인을 장애인으로 인정해달라는 소송은 국내에서 처음이다. 법률 대리인인 조미연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항바이러스제 개발 등 의학적 발전에 견줘 에이치아이브이 감염인의 현실은 신체적, 정신적 손상과 일상적인 제약 등 여러 측면에서 열악한데도 국가 차원의 지원은 부족하다. 장애인 복지 제도가 이를 포섭할 수 있지만 등록제도라는 한계가 있다. 에이치아이브이 감염인이 이러한 장애인 등록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소송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에이치아이브이 장애인정을 위한 전국연대’는 세계 에이즈의 날인 지난 1일 국민연금공단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정부는 장애인복지법의 ‘장애’의 정의를 사회적이고 포괄적으로 개정해 에이치아이브이 감염인을 장애인으로 인정하고, 감염인이 겪는 신체적·심리적·사회적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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