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시 장군(오른쪽)과 그의 동생 김형윤. 1925년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 기념사진으로 추정된다. 시민단체 열린사회희망연대 제공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 뭉치가 되어야 한다.”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명시 장군은 해방 직후 남북과 좌우로 갈라져 혼란한 우리 사회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그는 일본군을 상대로 무장 독립투쟁을 펼친 조선의용군에서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장군’으로 불린 지휘관이었다. 그래서 ‘백마 탄 여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해방 이후 유치장에 갇혀 생을 마감했고, 그의 주검은 어떻게 처리됐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는 지난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면서 비로소 독립유공자로 인정됐다.
김명시 장군의 일대기를 담은 책 ‘김명시’(이춘 지음, 산지니 펴냄)가 25일 나왔다. 1907년 경남 마산(현재 창원시)에서 난 김명시 장군은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한 데 이어 4년 뒤에는 활동지역을 만주로 옮겨 중국공산당 길림성 아성현위원회 부인부 책임 등으로 활동했다. 1930년 5월30일에는 한인 무장대를 이끌고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습격했다. 습격 직후 상해로 탈출해, 1931년 11월 중국공산당 한인지부 선전부 책임을 맡았다.
1932년 공산당 기관지 ‘코뮤니스트’를 서울로 반입했다가 붙잡혀 신의주형무소에 7년 동안 수감됐다. 출소 이후 중국으로 탈출해 중국 팔로군에 들어가 항일 전투를 치렀으며 1942년에는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 등을 조직하는 데 참여하고, 조선독립동맹 천진·북경 책임자를 맡았다.
‘김명시’ 표지. 시민단체 열린사회희망연대 제공
해방 후에는 여성운동 최대 결집체인 조선부녀총동맹 간부로 활동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지도자로 활동하던 1949년 9월3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붙잡혀 부평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가, 그해 10월10일 유치장에서 숨졌다. 당시 언론은 “10월10일 오전 5시50분쯤 자기의 겉저고리를 찢어 유치장 안에 있는 약 3척 높이의 수도관에 목을 매고 죽었다”는 정부당국 발표를 보도했다. 하지만 죽음의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주검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도 알 수 없다. 국가보훈부는 김명시 장군을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로 분류하고, 제보를 기다리고 있다.
이춘 작가는 책의 여는글에서 “김명시 장군의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이 끝이 아님을 절감하고, 그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기로 했다. 이 글을 통해 항일의 역사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밝혔다.
최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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