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군 주민주도 입지선정위원회 위원들이 지난 7월13일 하동군 금남면 면사무소 회의실에서 제5차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한전 남부건설본부 제공
2005년부터 2014년까지 10년 동안 경남 밀양에선 초고압 송전선로를 건설하려는 쪽과 이를 막으려는 쪽의 극심한 갈등이 이어졌다. 앞서 2000년 1월 정부는 울산 신고리원전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는 ‘제5차 장기전력수급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 따라 한전은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신고리원전에서 경남 창녕군 북경남변전소까지 90.5㎞ 구간에 송전탑 161기를 세우고, 765㎸ 송전선로를 놓았다. 송전탑 161기 가운데 69기가 밀양 5개 면 30개 마을에 들어섰다.
그러나 밀양 주민들은 2005년 말 환경영향평가 주민설명회가 열릴 때까지 이 계획을 전혀 몰랐다. 주민들은 2005년 12월5일 한전 밀양지사 앞에서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첫 집회를 열었다. 이 싸움이 이후 10년 동안 이어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정부는 공권력의 이름으로 저항하는 주민들을 농성 천막에서 쫓아냈고, 그조차 통하지 않으면 돈을 뿌려서 주민들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이 과정에서 주민 2명이 분신·음독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주민과 활동가 등 400여명이 사법처리됐다.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는 말을 낳은 이른바 ‘밀양 송전탑 사태’였다.
한전은 제2의 밀양 송전탑 사태를 막기 위해 2018년 ‘주민주도형 송전선로 건설사업’을 구상했다. 한전은 기본계획만 세우고, 송전선로 통과 노선과 송전탑 설치 장소 등은 한전 개입 없이 주민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이 이 구상의 핵심 내용이다. 하지만 이 구상에 따른 전국 첫 시범사업으로 2018년부터 추진해온 ‘154㎸ 남해-갈사(금남) 송전선로 건설사업’마저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닥쳤다. 주민들은 “주민 주도형이 아니라 주민 무시형 사업”이라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한전은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주민들과 제대로 소통할 기회가 없었다”고 해명한다.
17일 한국전력공사 남부건설본부, 경남 하동·남해군, 지역 주민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한전은 경남 하동군 금남면 금남변전소와 남해군 남해읍 남해변전소 사이 25㎞ 구간에 평균 400m 간격으로 송전탑을 세우고 154㎸ 송전선로를 연결하는 ‘154㎸ 남해-갈사(금남) 송전선로 건설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은 태풍·지진·산사태 등 영향으로 기존 송전선로에 문제가 생겨도 섬 지역인 남해군에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현재 단선인 송전선로를 복선으로 개선하려는 것이다. 사업이 마무리되면 남해군에는 그만큼 전력이 안정적으로 공급될 수 있게 된다. 사업은 2025년 11월 착공해 2027년 10월 준공 예정이다.
한전은 2018년 계획 단계에서 이 사업을 전국 첫 주민주도형 시범사업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한 뒤 하동군과 남해군에 ‘주민주도 입지선정위원회’를 각각 구성하게 했다. 위원회에는 마을이장·노인회장·부녀회장·새마을지도자 등 마을 대표와 한전 관계자, 군과 읍면동 공무원, 사회갈등연구소 연구원 등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한전은 “밀양 사태처럼 한전이 송전선로 건설을 주도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사회적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 주민들의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참여가 보장되는 입지선정위원회를 구성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20년 활동을 시작한 두 위원회는 최근까지 각각 6차례 회의를 열었다. 하동군 위원회는 송전선로 최적경과지 후보노선 3개를 선정한 상태이고, 남해군 위원회는 후보노선 선정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한전은 지난 8월 말 후보노선 선정이 끝난 하동군부터 주민설명회를 시작했다. 그런데 뒤늦게 사업계획을 알게 된 하동과 남해군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던 사업이 꼬이기 시작했다. 두 지역 주민들은 “한전이 주민과 협의 없이 사업을 추진했다”고 주장한다.
한전은 지난 8월31일 하동군 금남면 대치마을회관에서 ‘154㎸ 남해-갈사(금남) 송전선로 건설사업’ 관련 주민설명회를 열었다. 대치마을 주민 제공
지난 8월31일 하동군 금남면 대치마을에서 연 주민설명회에서도 주민들의 반발이 터져나왔다. 한전이 송전선로가 지나갈 금남면 지역 10㎞ 구간의 3개 후보노선을 설명하자, 참석한 주민들은 “환경파괴, 재산권 피해, 소음 피해 등이 발생할 것이 명백한데 환경전문가도 없이 입지선정위원회를 구성했고, 이마저도 주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고 진행했다”고 일제히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주민들은 “왜 굳이 육상에 송전선로를 놓으려고 하느냐. 하동화력발전소와 남해군 사이 해저에 송전선로를 깔면 비슷한 건설비용으로 기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며 자체적으로 준비해 온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들이 든 사례는 해저 송전선로를 통해 전기를 공급받는 제주도였다.
하지만 갈등은 주민들 내부에서도 불거지고 있다. 하동군 입지선정위원회 위원장인 이상기 덕포마을 이장은 “집집이 사람마다 생각과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각 마을 주민 대표들끼리도 의견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꼭 송전선로를 놓아야 한다면 땅속에 넣자는 게 주민 대표들 의견이었다. 하지만 한전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세가지 후보노선을 마련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어렵게 주민 대표들 의견을 모아놓았더니, 이제는 사업계획을 사전에 설명 듣지 못했다는 주민들이 들고일어났다. 무척 괴롭다”고 했다.
남해변전소가 있는 남해읍 심천마을 주민들은 변전소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미 50년 가까이 변전소 때문에 희생과 피해를 강요당했는데, 송전선로가 복선화되면 주민들의 희생과 피해는 더욱 커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변전소 이전 심천마을 대책위원회’는 지난 8월25일 변전소 이전을 요구하는 첫 시위를 열고, 한전 경남본부에 청원서를 전달했다. 이들은 지난달 1일 한전 본사까지 찾아가서 집회를 열었다. 대책위는 “변전소를 옮기는 것을 전제로 송전선로 복선화 사업에 동의할 수 있다. 이전을 약속한다면 마을 앞 망운산 중턱에 있는 마을 공동소유 땅을 변전소 이전지로 제공할 용의도 있다”고 했다.
이곤 남해군 지역활성과장은 “변전소 이전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런데 최근 송전선로 복선화가 추진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사업이 진행되면 변전소 이전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생각에 주민들의 반발이 커졌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주민들이 변전소 이전지 제공 등 대안을 제시했고 이를 논의할 협의체 구성도 제안한 만큼, 한전도 송전선로 지중화 등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전은 한전대로 억울함을 호소한다. 주민주도 입지선정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충분히 설명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뿐, 주민을 배제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남택하 한전 남부건설본부 팀장은 “송전선로 건설을 100% 찬성하고 반기는 마을은 없다. 주민 요구도 마을마다 다르다. 일부 마을에서 송전선로 해저 설치를 요구하지만, 그렇게 하면 어민들의 조업에 문제가 생긴다. 또 육상 노선을 일부 조정하면 인근 마을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애초 계획보다 사업이 많이 늦춰졌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관련된 모든 지역의 주민 의견을 취합해서 종합적인 대응 방안을 찾겠다. 그것이 주민주도형 시범사업의 취지를 살리기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최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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