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부산 중구의 보수동 책방골목. 길이 250m가량에 2~3m 너비의 골목에 31개 책방이 늘어서 있는 전국 최대 규모의 헌책방 거리에는 관광객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길바닥에는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등 작품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여러 책방에는 소설책에서부터 전문서적, 고문서, 만화책까지 다양한 책들이 쌓여 있었다.
중구 대청사거리 쪽 책방골목 들머리로 향하자 골목 한쪽에 공사 가림막이 펼쳐졌다. 이곳에는 책방 8곳이 있었는데 지난해 10월 지상 18층짜리 건물 신축 공사가 진행되면서 모두 문을 닫았다. 이곳 말고도 재건축이 곳곳에서 진행되면서 책방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14일 부산 중구와 보수동책방골목번영회의 말을 들어보면, 최근 책방골목 가운데 건물 2개가 부동산 업체에 팔렸다. 여기에 책방 3곳이 있다. 이들 책방 사장들은 건물주한테서 “3개월 안에 가게를 비워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3개 책방은 골목에서도 규모가 크고 보유 서적도 많은 곳으로 알려졌다. 관광객들이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입소문 난 책방도 있다. 3개 책방 가운데 한 책방 상인인 남아무개씨는 “지난해 10월 건물 신축 공사로 이사했는데, 또다시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 한다. 다른 가게를 알아보는 중인데, 마음이 착잡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책방 주인인 ㄱ씨는 “책방에 있는 10만권 이상의 책을 어디로 옮겨야 할지 난감하다. 책방골목에는 이 책들을 둘 수 있는 마땅한 터도 없는데 고민이 크다”고 했다.
보수동책방골목번영회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허양군 회장은 “개인 간 매매 계약이라 뾰족한 대응책이 없어 답답하다. 업체가 건물 2곳을 허물어 고층 오피스텔을 짓는다고 전해 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책방골목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는 책방이 사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지자체는 책방골목 보전 정책을 세워 실행할 수 있도록 애써달라”고 덧붙였다. 정애경 중구 문화관광과장은 “상인들과 협의해 구체적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부동산 업체와 접촉해 건물 1층에 책방 우선 세입을 요청하는 등 적극 대응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책방골목은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온 손정린씨 부부가 미군 부대에서 나온 헌 잡지, 만화 등을 팔면서 만들어졌다. 물자는 부족한데 교과서와 참고서가 필요했던 1970년대 전성기를 맞았고, 전국에서 고서와 절판된 책 등 문헌적 가치가 높은 책들도 이곳으로 몰렸다. 한때 100여곳의 책방이 자리잡았고, 헌책방의 메카로 불리기도 했다.
글·사진 김영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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