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평화공원 내 각명비에 새겨진 희생자 이름들 사이로 지워진 부분이 보인다.
“손자들이 찾아가도 당신 남편 이야기를 자주 해요. 시대를 잘못 만나서 억울하게 돌아가셨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죠. 힘든 과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주도청 초대 4·3사건지원사업소장을 지낸 김동화(78)씨는 어머니(101)한테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지만, ‘4·3’ 이야기만 나오면 마음 한구석이 착잡해진다. 김씨의 부친(당시 27)은 1949년 6월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 해 10월 행방불명됐다. 김씨는 유족들의 희생자 신고를 독려하곤 했지만 정작 자기 아버지는 희생자로 올리지 못했다. 아버지가 이른바 ‘무장대 간부’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국무총리실 산하 제주4·3위원회의 희생자 심사 과정에서 ‘불인정’됐기 때문이다.
1947년 3·1사건 이후 경찰에 수시로 불려가 고초를 겪던 아버지의 ‘입산’ 이후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 고모는 경찰에 끌려가 학살됐다.
김씨는 “2000년 당시 희생자 신고를 철회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신고를 독려하는 입장에서 철회할 수 없었다. 결국 희생자 심사에서 불인정됐고, 소송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화해와 상생을 이야기하면서 몇 사람만을 희생자 범주에서 배제해서야 되겠냐”고 말했다.
한 유족이 각명비에 새겨진 이름들을 살펴보고 있다.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 가면 원형 공간에 1만4천명이 넘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마을별로 새긴 각명비가 있다. 그 속에는 지워진 부분들이 눈에 띈다. 희생자 신청을 했다가 철회 요구를 받아 이름이 지워진 이들이다. 각명비 안내판에는 ‘한 맺힌 희생자의 넋을 달래고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설치했다고 하지만, 위로받지 못한 유족들은 여전히 4·3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김낭규(82)씨도 해마다 4월3일이 돌아오면 가슴앓이를 한다. 신촌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산으로 도피하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서북청년회에 끌려가 총살됐다. 어머니도 아버지의 입산 뒤 조천리 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총살당했다.
김씨는 산에서 활동하다 경찰에 잡혀 희생된 아버지를 4·3 희생자로 신고했지만 비공식적으로 신고 철회를 요구받았다. 김씨는 “자녀들은 연좌제 피해를 당했고, 아버지의 위패는 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에서 철거됐다. 아버지 위패가 내려진 뒤 사흘 동안 울었다”고 말했다.
위원회가 희생자 심사·결정을 하면서 기준으로 삼은 것은 2001년 헌법재판소의 판단이다. 헌법재판소는 보수세력들이 2000년 4·3특별법 제정 직후 위헌 취지로 청구한 헌법소원심판에 대해 각하 결정을 하면서 “4·3 발발에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 핵심 간부와 군경의 진압에 주도적, 적극적으로 대항한 무장대 수괴급 등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하기 때문에 희생자 범위에서 제외돼야 할 것”이라고 적시했다.
유족들이 제주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에서 위패를 찾고 있다.
위원회는 이를 근거로 희생자 심의·결정 기준을 정했다. 이 단서조항으로 인해 희생자에서 배제된 ‘희생자’들은 10~20여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유족들이 아예 희생자 신청을 하지 않았거나 신고를 했지만 위원회의 심의에 앞서 비공식적으로 철회 요구를 받아 철회한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전문가들은 4·3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는 관용과 포용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이재승 건국대 로스쿨 교수는 2019년 제주에서 열린 4·3 학술대회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내세워 봉기 주도자들의 희생자 지위를 박탈했는데, 이는 1948년 4월3일 봉기자들에게는 아직 확립되지 않은 법관념이었다. 헌법재판소의 배제 결정은 화해와 상생의 관점에서 재고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찬식 전 제주4·3연구소장은 “4·3 희생자에는 군경, 우익단체 출신 등 이른바 가해자 쪽에 속한 이들도 들어가 있다. 4·3 해결 과정에서 유족이나 도민들이 받아들였던 것은 관용의 정신이었다. 유족회가 가해자를 포용했듯이 당시 항쟁파도 시대적 희생자로 보고 관용의 정신으로 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4·3연구소 관계자는 “4·3위원회가 희생자 결정 기준을 논의했던 20년 전에는 배·보상 문제에 대한 언급은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이 문제를 법에 담았다. 희생자 배제 대상을 정한 단서조항을 재검토해야 한다. 죽은 자들은 차별받지 않고, 애도받을 권리를 누려야 한다. 4·3특별법의 정신은 화해와 상생, 포용이다”라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