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전국 제주

“이제서야 아버지의 죽음 무죄, 기쁘지만 한편으론 서럽다”

등록 2021-03-16 18:38수정 2021-03-17 02:41

제주 4·3 ‘수형 행불인’ 335명 전원 무죄
사법사상 유례없는 판결에 법안 안팎 환호와 눈물
“오늘은 아버지 제삿날…‘4·3 무죄’ 써 올리고 싶다”
“법이 두려웠고 법이 고맙다”…“큰절 올리고 싶다”
1948년 제주4·3 당시 감옥에 끌려갔다가 행방불명된 이시전(당시 33살)씨의 딸 이임자(79)씨가 16일 오전 제주시 제주지방법원에서 4·3 수형인 335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법원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이날은 고인이 된 아버지 이시전씨의 생일이자 제삿날이었다. 제주/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1948년 제주4·3 당시 감옥에 끌려갔다가 행방불명된 이시전(당시 33살)씨의 딸 이임자(79)씨가 16일 오전 제주시 제주지방법원에서 4·3 수형인 335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법원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이날은 고인이 된 아버지 이시전씨의 생일이자 제삿날이었다. 제주/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저승에서 온 330여 영혼을 대신해 묵례를 올리겠습니다.”

16일 오전 제주지방법원 제201호 법정에서 열린 재심 청구소송에서 무죄가 확정되자 4·3 당시 행방불명된 고 박세원씨의 아들 박영수씨가 일어나 재판부에 묵례를 올렸다.

제주4·3 당시 불법적인 군사재판을 받고 억울하게 수형 생활을 하다 행방불명된 이른바 ‘수형 행불인’ 335명(일반재판 생존자 2명 포함)의 재심 청구소송 선고공판이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13~21명 단위로 18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재판부는 내란죄와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 등으로 징역형을 받았던 335명 모두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대한민국 사법사상 유례가 없는 재심 청구소송 규모였고, 335명 전원 무죄 판결을 받은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재판장 장찬수 부장판사는 “국가가 완전한 정체성을 갖지 못했을 때 피고인들은 목숨마저 빼앗겼고 자녀들은 연좌제에 갇혔다. 지금까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삶을 살아냈는지 과연 국가는 무엇을 위해, 그리고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몇번을 곱씹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며 “오늘의 이 선고로 피고인들과 그 유족들에게 덧씌워진 굴레가 벗겨지고, 고인이 된 피고인들이 저승에서라도 오른쪽 왼쪽을 따지지 않고 낭푼(양푼)에 담은 지실밥(감자밥)에 마농지(마늘장아찌)뿐인 밥상이라도 그리운 사람과 마음 편하게 둘러앉아 정을 나누는 날이 되기를, 살아남은 우리는 이러한 일이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제주4·3유족회장을 지낸 홍성수씨는 아버지의 무죄 선고가 내려지자 “큰절을 올려도 되겠나. 영원히 못 잊을 오늘일 것 같다”며 눈물을 닦았다. 법정에서는 무죄 판결이 날 때마다 환호의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할머니들은 그동안 억눌렀던 눈물을 쏟기도 했다.

재판 시작 1시간30분 전부터 기다리던 이임자(79), 이석종(77)씨 남매는 “오늘이 행방불명된 아버지(이시전·당시 33) 제삿날”이라고 했다. 석종씨는 “형무소에서 행방불명돼 생신날에 제사를 지내는데 바로 오늘이에요. 제사상에 맛있는 음식과 ‘4·3 무죄’라는 글을 써서 올리고 싶다”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백운기)가 대전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백여옥(79·제주시 조천읍)씨는 “아버지의 죽음이 인정되고, 무죄가 돼서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서럽다”고 말했다. 허순자(77·제주시 구좌읍)씨는 아버지의 무죄가 선고되자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아들 형제를 다 뺏어간 나라가 우리를 빨갱이라고 한다면서 날마다 울며 살았다. 할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기뻐했을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프다”며 가슴을 쳤다. 아버지(강문수)가 목포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강전향(79·제주시 봉개동)씨는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하며 눈물을 쏟았다. 강씨는 “어머니는 유족 신청을 하는 것도 두려워하다가 지난해 97살로 돌아가셨다. 어릴 때는 법이 두렵기만 했는데 이제는 법이 고맙다”고 했다.

제주4·3 수형 행불인들에 대한 재심 청구소송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유족들이 감정이 복받쳐 고개를 숙이거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제주4·3 수형 행불인들에 대한 재심 청구소송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유족들이 감정이 복받쳐 고개를 숙이거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제주4·3 수형 행불인에 대한 재심 청구소송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고 박세원씨의 아들 박영수씨가 고개를 깊이 숙여 절을 하고 있다.
제주4·3 수형 행불인에 대한 재심 청구소송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고 박세원씨의 아들 박영수씨가 고개를 깊이 숙여 절을 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할머니(강어생·당시 39)의 사진을 들고 법정에 출석한 유족도 있었다. 박용현(68·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씨는 “아버지가 몇년 전 돌아가실 때 큰아들인 내가 할머니의 한을 풀어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오늘 그 약속을 지키게 돼 너무나 기쁘다”며 감격해했다.

제주4·3 때인 1948년과 1949년 군사재판을 받은 이는 ‘수형인명부’상 최소한 2530명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집단학살됐다. 제주4·3 당시 전체 행방불명된 이는 4255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달 26일 국회에서 통과된 제주4·3특별법 전부 개정안에는 군사재판 및 일반재판 수형자들이 특별재심 또는 일괄재심을 통해 재심 청구소송을 할 수 있도록 해 명예 회복의 길이 좀 더 쉬워질 전망이다.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전국 많이 보는 기사

외국인 마을버스 운전기사 나오나…서울시, 인력 부족에 채용 추진 1.

외국인 마을버스 운전기사 나오나…서울시, 인력 부족에 채용 추진

화염 속 52명 구한 베테랑 소방관…참사 막은 한마디 “창문 다 깨” 2.

화염 속 52명 구한 베테랑 소방관…참사 막은 한마디 “창문 다 깨”

515m 여주 남한강 ‘출렁다리’ 내년 5월 개통 3.

515m 여주 남한강 ‘출렁다리’ 내년 5월 개통

[영상] “지하철역 식사, 세 가정 근무”…필리핀 가사관리사 호소 4.

[영상] “지하철역 식사, 세 가정 근무”…필리핀 가사관리사 호소

“멈춰달라” 호소에도…이번엔 바다서 대북전단 날린다는 납북가족단체 5.

“멈춰달라” 호소에도…이번엔 바다서 대북전단 날린다는 납북가족단체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