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지석.
“1948년 11월21일 중산간 마을인 가시리가 소개되자 저는 부모님과 여동생, 남동생과 함께 표선리로 내려와 국민학교에 수용됐습니다. 형님 세분은 마을에 머무른 채 피신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다른 도피자 가족 74명과 함께 끌려가 학살됐습니다. 형님들은 나중에 모두 잡혀 한분은 제주에서, 다른 두분은 육지 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됐습니다.”
21일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 증인석에 앉은 오국만(89)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덟 식구 대가족이 4·3이 끝나자 저와 동생 둘만 남았다. 억울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다”며 울먹였다. 당시 15살 이상은 모두 학살됐는데, 17살이던 오씨는 아버지가 사태를 예견한 듯 수용자 명단에 14살로 적어 살아났다.
희생자 유족들은 매주 월요일 제주지방법원에서 70년 넘게 풀지 못한 저마다의 사연과 한을 토해냈다. 21일을 마지막으로 끝난 제주 4·3 수형행불인 재심청구소송 심문 절차에는 40여명의 유족이 참여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었다. 제주 4·3 희생자에 대한 정부의 배상·보상을 담은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은 더불어민주당이 다음달 8일 끝나는 임시국회 회기 안에 꼭 처리하겠다고 밝히면서 국회 통과를 눈앞에 두고 있다.
국회의원과 제주도의회 의장을 지낸 장정언(85)씨는 행방불명된 형님(당시 18살)의 재심청구 대리인으로 나왔다. “어머님은 행방불명된 아들을 ‘죄 어신(없는) 아이’라고 하며 울면서 보냈고, 평생 새벽이면 정화수를 떠놓고 ‘살아 돌아오라’는 기도를 하다가 돌아가셨다. 저는 어머님 한을 풀어드리겠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며 흐느꼈다.
지난 14일 증인석에 앉은 변산일(80)씨는 어머니와 남동생이 정체 모를 사람들의 손에 무참하게 죽는 장면을 목격했다. 자신도 죽기 직전 살아났다는 변씨는 증언 도중 말을 잇지 못한 채 흐느끼다 통곡했다. “어이없어. 아이구~. 어머니, 아버지라는 말을 못 해보고 살았으니 아픕니다.” 변씨의 아버지와 백부는 4·3 당시 육지 형무소로 끌려간 뒤 한국전쟁 직후 행방불명됐다.
최낙균 변호사의 심문이 끝나고 재판장 장찬수 판사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형님, 남동생이 4·3 때 다 죽었습니까?” “예.” “그럼 청구인이 할아버지의 대를 잇는 유일한 손자네요.” “예.” “저도 아픈데 아픈 기억을 이 자리에 와서 말씀하시는 분들은 얼마나 아플까요.” 장 판사의 말에는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났다.
매주 월요일 재판이 열리는 오전 10시가 가까워지면 201호 법정은 지팡이를 짚거나 자식들의 도움을 받아 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로 붐빈다. 이들은 4·3 당시 수형 생활을 하다가 행방불명된 이른바 ‘4·3 수형행불인’들의 배우자와 자녀, 형제자매 등 유족들이다. 행불인들은 당시 대부분 군사재판을 받고 수감 생활을 하다 한국전쟁 뒤 행방불명됐다. 매주 4명씩 진행하는 이들의 증언은 기억의 고문에서 달아나려는 몸부림이다. 법정은 유족들의 한숨과 눈물로 가득 찬다.
제주4·3 수형행불인 재심청구소송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유족이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4·3 수형행불인 재심청구소송은 청구인만 350여명에 이르는 대규모 재심청구소송이다. 변호인단에는 문성윤 변호사를 중심으로 강창훈·박현민·최낙균 변호사 등 4명이 참여했다. 21일 심문기일이 끝난 청구소송은 이제 재심 개시 여부만 남겨두게 됐다. 지금까지 10여차례 진행된 심문 절차에는 모두 40여명의 유족이 나와 당시의 상황과 사건 이후의 삶을 토해냈다. ‘억울함’과 ‘한’을 쏟아낸 이들은 한결같이 ‘명예회복’을 바랐다.
아버지가 행방불명되고 백부모가 경찰에 학살된 강방자(78)씨는 ‘하시고 싶은 말이 있으면 아무 얘기나 하시라’는 재판장의 말에 “하고 싶은 이야기야 많지만 가방끈이 짧고 할망이 무슨 말을 하느냐. 4·3이 끝나고 나니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유일한 딸로 나중에 저승 가면 아버지한테 ‘더러운 불명예를 씻고 왔습니다’라고 말하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지난 14일 제주4·3 수형행불인 재심청구소송이 열리는 제주지방법원에서 기다리는 재심청구인들.
강씨는 “생후 8개월짜리 남동생을 업고 달아나던 어머니가 토벌대의 총에 맞아 죽고 동생은 엄마의 젖을 빨았다”고 했다. 장 판사는 “강요배 화가라고 있다. 4·3 연작을 그렸는데 젖먹이가 죽은 엄마의 젖을 빠는 그림이 있다. 시간 되시면 꼭 한번 보시라. 그 광경이 생생하게 그려질 것이다”라며 위로했다. 그는 귀가 잘 안 들리는 어르신들을 위해 증인석까지 다가가 질문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총살되고 남은 가족들과 12살의 나이에 가을과 겨울 동안 산속 피신 생활을 했던 고만석(85)씨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울음을 터뜨렸다. 고씨는 “먹을 것이 없었고, 밤이 되면 추워 떨었다. 가을에 마을을 떠나 이듬해 봄이 돼서야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전단을 보고 귀순했지만 형님은 육지 형무소로 끌려간 뒤 행방불명됐다. 형님의 심정을 헤아려달라”고 호소했다.
유족들의 증언에 방청석은 종종 눈물바다가 됐다. 아버지가 육지 형무소로 끌려간 뒤 태어난 유복자 채지형(72)씨는 지난달 16일 증인석에서 “스무살에 저를 낳은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농사만 지었다. 아버지를 끌고 가서 무슨 근거로 15년 형을 선고하고 학살했는지 (나라에) 묻고 싶다. 어머니가 감당했던 삶의 무게가 너무나 컸다. 아버지의 인생이 국가권력에 유린당했다”고 말했다. 채씨가 “증언 전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새벽에 글을 썼다”며 준비한 글을 읽어 내려가자 여러 방청객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부금자(81)씨는 “삶이 힘들었다. 벌레들이 똥을 싼 보리채(보리쌀 겉껍질)에 쑥을 버무려 먹고 살았다.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4·3이 여자의 일생을 망가뜨렸다”고 했고, 김용렬(79)씨는 “아버지 시체를 찾으면 한이 없겠다. 동생은 4·3사건 때 엄마 젖이 나오지 않아 굶어 죽었다”고 말했다.
장 판사는 큰오빠의 행방불명이 자기 탓이라며 한 할머니가 흐느끼자 “할머니 잘못이 아니다. 그 시절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많이 벌어졌다. 전체가 다 이상하게 돌아갔다”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유족 일부는 국가가 의무를 저버렸다고 했다. 진찬훈(86)씨는 “그런 세상이 다시는 오지 말아야 한다. 국가의 존재 의무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 아니냐. 아무 죄도 없는데 집을 불태우고 잡아간 것은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라고 했다.
최낙균 변호사는 “사실 현재 재심청구인 수인 350여명의 배 이상 접수 신청을 받아 재판을 진행하고 있고, ‘수형인 명부’나 제적등본 등이 같은 동일인이나 사망 여부 등 재판부가 확실히 받아들일 수 있는 분들만 추려서 재심청구소송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와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수형인 명부’상 4·3사건 과정에서 체포돼 1948년(871명)과 1949년(1659명) 두차례에 걸쳐 군사재판을 받은 이는 2530명에 이른다. 사형을 선고받은 287명을 제외한 나머지 2243명은 징역 1년~무기징역 형을 선고받고 육지 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했고, 이 가운데 1176명은 행방불명된 것으로 신고됐다. 일반재판 행방불명자도 270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정치범으로 몰려 집단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수형인의 명예회복을 요구해왔다. 지난해 1월에는 수형 생활을 하다 돌아온 수형생존자 18명이 무죄 취지의 공소 기각 판결을 받았고, 형사보상도 받았다. 유족들은 국회와 제주도에서 군사재판 무효화와 희생자 배상·보상을 요구하며 여러해 동안 시위를 벌여왔다.
지지부진했던 4·3 특별법 개정은 최근 실마리가 보인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18일 “이번 임시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같은 당 오영훈 의원(제주시을)이 대표발의한 4·3 특별법 전부개정안은 △추가 진상조사 및 국회 보고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배상·보상 △군사재판의 무효화 및 범죄기록 삭제 등을 담았다. 이 가운데 군사재판의 무효화는 법무부와 행정안전부가 4·3 수형인에 대한 일괄적 ‘직권 재심’을 추진하는 대안을 제시해 합의점을 찾았다. 하지만 일괄 재심은 후손이 없거나 재심을 신청할 여력이 없는 유족들도 상당수여서 어려움이 예상된다는 지적도 있다. 배상·보상이 어떤 식으로 정리될지도 관심사다.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