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4·3 행방불명 수형인 재심청구 심문에 증언자로 나섰던 김을생 할머니가 남동생 김필문씨와 법정을 나서고 있다. 허호준 기자
“남편 시체만 찾아 봉분을 만들어주면 내일 죽어도 좋습니다. 내가 만든 가족 공동묘지에 남편 비석이 있지만 시체도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남편 봉분 없는 것이 한입니다.”
올해 100살 된 현경아 할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난 14일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재판장 장찬수)가 제주4·3 당시 수감생활을 하다 행방불명된 10명에 대한 재심청구사건 심문을 진행하는 자리에서 현 할머니의 증언이 이어지자 법정은 숙연해지고, 눈시울을 훔치는 모습도 보였다.
꼿꼿한 모습의 현 할머니는 남편이 형무소로 끌려간 뒤 남겨진 두 딸과 혼자서 낳은 아들 등 3남매를 키운 과정을 설명했다. 현 할머니는 “집을 불태운다고 해서 무작정 아이들 손을 잡고 나왔다. 남편과는 그때 헤어진 게 끝이다. 제주시 아라2동에 살던 아는 사람이 먼저 형무소에서 석방돼 나와 ‘형님이 너무 추우니까 옷을 보내달라고 했다’ 해서 옷을 보낸 적이 있다. 너무 어렵게 살아서 면회도 가지 못했고, 아이들 때문에 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이날 변호를 맡은 문성윤 변호사에게 재판 도중 간간이 증언자들의 제주 사투리를 설명해달라며 경청했다. 현 할머니는 “한번은 밭에 일하러 갔다 오니 큰딸이 없어졌다. 찾으러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딸이 밭고랑에서 자고 있더라”고 회고했다. 이날 현 할머니는 딸과 함께 법원을 방문했다.
두번째 증언자로 나선 김을생(86)씨는 당시 아버지가 희생됐다. 지팡이를 짚고 증언대에 앉은 김씨는 “경찰에 구금된 아버지 면회를 계속 가서 그때 일을 기억한다. 어머니는 경찰에 불려가 전기고문을 받은 뒤 고문 후유증으로 젖이 나오지 않아 3살짜리 막내 남동생에게 젖을 물리지 못했다”며 통곡했다.
세번째 증언자는 형이 행방불명된 이상하(85)씨다. 이씨를 제외한 그의 가족은 4·3 당시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집 근처 밭에서 8명 모두 경찰에 몰살됐다. 이씨는 앞으로 넘어지면서 입안으로 흙이 들어가는 바람에 죽은 척했다가 살아났다고 했다. 당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대한민국 만세’였다며 말끝을 흐렸다. 이씨는 “산에 올랐던 형(당시 25)은 자수해서 서귀포에 있다가 제주시로 갔는데 그게 끝이다. 4·3 당시 조부모, 부모, 형제, 누님의 아기까지 온 가족 4대를 몰살시켰다. 어느 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울먹였다.
앞서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수형생활을 하다 행방불명된 349명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재판부는 앞으로 경인(서대문·마포·인천형무소), 호남(광주·목포·전주형무소) 지역 수감 사실 등과 관련해 20여차례 심문을 진행한다.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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