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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비극의 빌레못굴…70여년 만에 빗장 열다

등록 2020-07-07 16:23수정 2020-07-07 17:26

1949년 1월 주민 25명 학살돼…갓난아기도 희생
옹기와 사기 그릇 파편들…비녀와 머리빗도 발견
4·3연구소 “한라산·천연동굴 등 4·3유적 조사 필요”
제주4·3 비극의 현장인 애월읍 빌레못굴 조사에 앞서 이규배 제주4·3연구소 이사장이 7일 축문을 읽고 있다.
제주4·3 비극의 현장인 애월읍 빌레못굴 조사에 앞서 이규배 제주4·3연구소 이사장이 7일 축문을 읽고 있다.
“굴로 사람들이 들어오는 그림자가 어른어른 보였어. 민보단과 경찰, 군인들이었어. ‘살려줄 테니 나오라’고 해도 나는 나가지 않고 돌 틈에 숨었지. 굴 속에 있던 사람들이 잡혀 나가는 것이 보였지. 그 사람들이 굴 밖으로 나가자마자 굴 입구에서 죽였어. 경찰은 어린아이의 다리를 잡아 바위에 거꾸로 메쳐 죽어버렸어. “(제주4·3연구소 증언집,<빌레못굴, 그 끝없는 어둠 속에서>)

1949년 1월16일 제주 애월읍 빌레못굴에 주민들과 함께 피신했다가 몸을 숨겨 학살현장에서 살아났던 고 양태병씨는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4·3 당시 빌레못굴에 숨어 살던 주민 30여명 가운데 25명이 군·경·민 합동토벌대에 굴이 발각돼 집단학살됐다.

7일 오전 10시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 빌레못굴의 빗장이 열렸다. 제주4·3연구소와 제주4·3평화재단으로 구성된 조사단이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고 빌레못굴에 들어갔다. 천연기념물 제342호로 지정된 이 굴은 학술조사 때만 간헐적으로 동굴 및 고고학 연구자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제주4·3 당시 갓난아기가 토벌대의 손에 처참하게 죽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만 전해지던 빌레못굴이 4·3연구자들에게 문을 연 것은 학살사건이 일어난 지 70여년 만에 처음이다.

빌레못굴에서 발견된 비녀와 일본 동전, 그릇 파편들.
빌레못굴에서 발견된 비녀와 일본 동전, 그릇 파편들.
이날 새벽부터 제주시내에 폭우가 퍼붓자 연구소와 재단 쪽 관계자들은 계획대로 조사가 진행될지 우려했으나, 빌레못굴 앞에 다다르자 날이 활짝 개었다. 빌레못굴은 제주의 중산간 좁은 농로를 따라 이어지다 수풀 속으로 들어가야 나타났다.

연구소와 재단이 미리 준비한 제물을 진열하고 이규배 제주4·3연구소 이사장이 당시 희생된 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축문을 읽어내려갔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안웅산 박사가 동행한 이번 조사에는 문화재청의 허가대로 5명이 참여했다.

한 사람이 통과할 정도인 급경사의 굴 입구를 들어서 5m쯤 들어가자 돌이 평편하게 다져져 있고, 깨진 옹기 파편들이 이곳저곳에 보이기 시작했다. 빌레못굴은 전체 길이가 11.7㎞에 이르러 국내에서 가장 긴 굴이다. 폭우가 내린 탓인지 동굴 천장 곳곳에서는 빗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용암동굴 안의 바위들은 미끄럽고 흘러내린 빗물에 진흙탕이 된 곳도 곳곳에 있었다. 옹기들은 주둥이만 있는 것도 있고, 밑바닥만 남은 것도 있었다.

빌레못굴에서 발견된 머리빗.
빌레못굴에서 발견된 머리빗.
간간이 하얀 사기그릇 파편도 보였다. ‘소화 13년’, ’소화 10년’이라고 적힌 일본 동전들과 부녀자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빗도 있었다. 누군가의 머리에 꽂았던 녹슨 비녀도 눈에 띄었다. 주민들이 식량을 갖고 와 음식을 만들었던 화덕과 깨진 무쇠솥 파편도 보였다. 굴은 50~60m 정도 더 들어가자 수십명이 충분히 서 있을 정도의 공간도 나왔다.

안 박사와 부 팀장의 안내로 조사단이 들어간 곳은 160m 정도까지 들어갔다. 4·3 당시 피난민들도 주로 굴 입구 쪽에 모여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산도 무섭고 해안도 무서웠던’ 주민들은 군·경 토벌대의 토벌을 피해 1948년 11월 이곳으로 숨어들었다. “거의 아기 엄마들이야. 아기를 안은 여자를 포함해서 부녀자들과 할아버지도 한 분 있었어. 아기 안은 사람은 35살 정도 되는 엄마. 갈중이 적삼(갈옷) 입고 얼굴은 시커멨어. 굴에 있던 사람들을 촐왓(풀밭)에 전부 나오라고 해서 앉도록 했지. 그래놓고 전부 쏘아버렸는데 엄마가 안은 물애기(갓난아기) 양다리를 두 손으로 잡아서 촐왓에 있는 돌에 메쳤을 거야. 경찰이 그랬어. 5살 아이는 총살할 때 ‘살려주세요’해도 쏘았지.”(허영선 <제주4·3시기 아동학살 연구>)

불을 피웠던 화덕과 옹기 파편들.
불을 피웠던 화덕과 옹기 파편들.
당시 학살현장에 동원됐던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군·경·민 합동토벌대에 잡히지 않았던 모녀는 굴 안 어둠 속에서 숨졌다. 이들의 주검은 1971년 3월 빌레못굴 탐사반에 발견돼 유족에게 인계돼 안장됐다.

조사단 가운데 한 명이 당시 굴에 숨었던 “랜턴을 끄자”고 제안했다. 모두가 랜턴을 끄자 불빛조차 새어 나올 구멍이 없었다. 한 일행이 “이렇게 깜깜한 곳에서 그 분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살았을까”하고 말했다. 이규배 이사장은 “4·3 당시 유물이 이렇게 많이 파편화된 채 남아있는 곳은 빌레못굴이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이 많이 피신해서 살았던 한라산 국립공원 안이나 천연동굴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미흡하다”며 조사 필요성을 제기했다.

간단히 제를 지내고 축문을 읽어내려가는 동안에 잠시 비가 그쳤던 빌레못굴에는 70여년 만에 처음 4·3 조사를 한 일행이 나오자 당시 희생된 이들의 눈물인 듯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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