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정방폭포의 붉은 등불들 고승욱 작가 제공
여명이 밝아오는 밤, 떨어지는 폭포의 하얀 물줄기 아래 젖은 바윗가에 놓인 빨간 보자기의 등불이 가늘게 흔들린다. 폭포 물소리만이 들리는 새벽녘의 불빛은 영혼의 빛처럼 하늘거린다. 멀리서 본 붉은 등불은 붉은 동백꽃이다.
산방산이 지척에 보이는 서귀포시 안덕면 백조일손지묘 위로 먹구름이 몰려왔다. 어두운 무덤가 곳곳에 놓인 노랗고 빨갛고 하얀 보자기 속 등불들은 희생자들의 이름을 불러내는 거룩한 의식이다.
성산 일출봉이 어슴푸레 보이는 터진목 집단학살터에 쌓아 올린 하얀 보자기 속 노란 불빛은 이곳에서 스러져간 사람들의 절규다. 어둠이 걷히기 직전, 대나무가 어깨를 비벼대며 우는 대나무숲 사이 하얀 보자기의 등불은 토벌대에 쫓겨 피신한 사람들의 두려운 눈빛이다.
서귀포시 안덕면 백조일손지묘. 고승욱 작가 제공
어둠과 밝음의 경계, 그것은 죽음과 삶의 경계였다. 작가는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어둠 속 보자기에 싼 등불을 통해 학살의 자리, 잃어버린 삶터를 떠도는 영혼에 부드러운 빛이 닿고 감싸주기를,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기를 기원했다.
제주땅 곳곳에서 벌어진 학살의 자리를 찾아 몰두한 작가의 작품 활동은 ‘어두운 시대에 올리는 작은 등불’이자 ‘피의 땅에 발 딛고 살아온 훗사람의 소박한 제의’였다. 그 위로는 외롭고 쓸쓸하게 암과 싸우는 자신에 대한 위로이기도 했다.
지난 23일부터 다음 달 31일까지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열리는 ‘고현주 작가 유고전-기억의 목소리’는 작가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시간이다. 오랜 기간 암과 싸우며 자신보다 4·3의 영혼들을 기억하고 위로하는 작업을 치열하게 벌여온 고 작가는 지난해 12월 58살을 일기로 눈을 감았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전시를 소망했던 작가의 생전 뜻에 따라 작가의 유족과 제주4·3평화재단이 유고전을 마련했다.
2018년부터 4·3 유품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기억의 목소리’ 작업을 해왔던 작품과 함께 전시한 작가의 작품 노트 겸 일기는 투병 속에서도 열정을 불태웠던 작가의 진정성을 마주할 수 있다.
“암 2기가 조금 지났다고 판정받았다. 뭐 이래, 삶이…정말 치열하게 살았는데 또 더 치열하게 싸우라고. 지친다. 눈물이 나지만 참느라고 참았는데 자꾸만 울컥거린다.” (2016.5.2)
작가는 2016년 5월 처음으로 암 판정을 받았다. 자꾸만 눈물이 났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병이란 인간에게 ‘겸손함’을 선물해준다. 병원 뒤쪽에 산책로를 걸었다. 싱그러운 햇초록이 아침 햇살에 부딪혀 살랑거린다. 자연의 선물이다.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보이는 것, 느끼는 것, 관계 맺은 모든 것에 감사해 하는 시간의 연속이다.” (2016. 5.19)
제주4·3 당시 집단 학살터였던 서귀포시 성산포 터진목. 고승욱 작가 제공
초록의 풀과 나무가 선물이었고, 감사와 겸손을 배웠다. 병세는 호전과 악화를 반복했지만, 그럴수록 작품과 생명에의 열정도 커졌다. 2016년 마지막 날, 작가는 노트에 이렇게 썼다.
“내 몸에 암이란 덩어리를 끌어안은 채 어쩌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음에도 이토록 초연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을 비워냈다고 생각했지만 문득문득 삶의 욕망 덩어리들이 아직도 불쑥 솟구쳐 오른다. 다시 내 삶의 심장에 뜨거운 무언가를 집어넣어야 된다.”
작가는 2016년과 2017년 사이 요양원에서 보낸 겨울의 ‘외로웠고, 추웠고, 서러웠던’ 때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당당히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길가의 꽃을 보며 위안으로 삼았다.
학살 벌어진 제주땅 곳곳 찾아
어둠 속 보자기에 싼 등불 올려
암과 싸우며 작품 찍다 작년말 별세
31일까지 4·3평화기념관서 유고전
투병 속 진정성 담은 작품 노트도
“내 몸에 암 덩어리 끌어안은 채
4·3 겪은 기억 길어 올리는 중”
투병 속에 작가는 꾸준히 개인전을 열었고 초대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기억의 목소리1>(2019), <기억의 목소리2>(2020), <기억의 목소리>(2021)를 펴냈다.
작품 활동은 희생자에 대한 치유이자 자신에 대한 치유이기도 했다. 4·3을 겪은 한 할머니를 설득해 20대 때 입었던 할머니의 한복을 빌려왔을 때의 심정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기록하는 자이다. 그들의 처참하고 비극적인 4·3을 겪는 중에서도 물건을 통한 사소한 기억들, 그 모서리의 뾰족한 잊혀졌던 기억을 인터뷰하면서 조금씩 길어 올리는 중이다. 사물이 매개를 통하여 그들의 잠시나마 행복했던 순간들을 기록하는 거다. 그러면서 나의 삶을 돌아보고 치유하고 동시에 4·3 영령들과 그 유족들도 같이 치유하는 시간이 되길 오늘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2019. 4.3)
강은택 유족 아버님의 유년 저고리. 고승욱 작가 제공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작가의 치열한 4·3과의 대면은 순수하고 진솔했다. 전시장 입구에는 작가가 지난해 남겼던 글이 적혀 있다.
“그냥 했다. 어떠한 설명도 할 수 없다. 이 작업을 하면서 내 스스로 위로를 받았고, 작업을 도와주신 분들도 위로를 받았다. 작업 과정은 오롯이 나에게 혹은 그들에게 따뜻한 빛으로 가 닿았다. 보자기를 수백 번 묶고 풀 때마다 그들에게 이 빛이 작은 위로가 되기를 빌었다. 서글프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 묻힌 4·3 영령들과 그 풍경 속에 다가서는 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운 제의에 밝힌 불빛이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란다.”
전시는 작가의 38점의 사진 작품과 동생 고승욱 작가의 11점의 설치미술로 구성됐다. 이번 전시는 유족 고승욱 작가가 공간을 구성했다. 30일 공식 개막식에서는 고인이 생전 4·3 유족을 촬영하면서 얻었던 희생자 유품 기증식도 있었다. 작가의 목소리는 오래도록 ‘기억의 목소리’로 남을 것 같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