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이교동에서 밭일을 하던 김순자씨가 밭에 있는 옛 일본군 통신시설을 가리키고 있다. 허호준 기자
“우리 시아버지 땅에 저런 시설을 만들어 놨어. 일본 사람들이. 바로 옆 논밭에서 흙을 퍼다가 덮어서 동산처럼 쌓고 그 위에 만든 거야.”
지난 27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이교동에서 밭일을 하던 김순자(87)씨가 콘크리트 구조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김씨의 밭은 대정읍 알뜨르비행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김씨가 가리킨 구조물은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듯 무성한 나무 덩굴에 휘감겨 있었다. 디귿(ㄷ)자 형태의 콘크리트 옹벽 위에 굴뚝 모양의 기둥이 붙어 있는 이 구조물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군 통신시설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때는 탄약고로 사용됐다. 김씨의 말이 이어졌다. “시아버지가 저거 만들 때 고생을 많이 하셨지. 어머니는 일본군들이 있으니까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어.”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알뜨르비행장 일대에 널려 있는 옛 일본군 비행기 격납고(유개엄체). 허호준 기자
청명한 봄 날씨를 보인 이날, 알뜨르비행장 일대에서는 밭갈이가 한창이었다. 이곳에는 옛 일본군 격납고 10여동이 흩어져 있는데, 주변이 모두 밭이어서 격납고를 농기구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는 농가도 있었다. 트랙터 여러 대가 부지런히 밭을 가는 동안 농사용 트럭들이 비좁은 도로를 분주히 오갔다. 올레 10코스를 걷는 도보 여행객들도 보였다.
알뜨르비행장이 위치한 송악산 일대는 일본 군국주의의 대륙 침략과 조선인 강제동원의 적나라한 흔적을 보여주는 야외 박물관이다. 일제는 제주를 중국 침략의 전진 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1933년부터 알뜨르비행장 건설에 착수했다. 이 비행장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부터는 중국 난징과 상하이 폭격의 발진 기지로 활용됐다.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에는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결 7호작전’이 수립되면서 만주 주둔 관동군과 일본 본토 수비 병력 등 6만5천여명(조선인 징병자 1만5천여명 포함)이 제주도에 전환 배치됐고, 항공기와 중화기를 갖추고 연합군과의 전투를 준비했다.
관광객들이 옛 일본군 비행기 모형을 전시한 격납고를 둘러보고 있다. 허호준 기자
이 과정에서 일본군들은 알뜨르비행장 일대를 군사요새로 만들었다. 해군 특공기지와 미로처럼 얽힌 갱도진지가 지하에 만들어졌고, 비행장 방어를 위한 고사포 진지도 설치됐다. 제주도민들을 상시 동원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패망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제주도의 모든 마을에서 초등학교를 마칠 나이가 되면 수십명씩 단체로 군사시설 조성공사에 동원됐다.
제주도민들에게는 당시 강제 동원의 기억이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한겨레>는 제주도내 일본군 군사시설 구축에 동원됐던 제주도민들을 생전에 만나 인터뷰한 바 있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이 터지고 알뜨르비행장에서 3년을 일했지. 처음 갈 때는 비행장을 확장할 때였는데 마을에서 몇 명 나오라고 하면 나가서 며칠씩 일을 했어. 비행장 공사도 전부 삽과 곡괭이로 했지. 비행장 일대에 레일을 설치해서 평탄화 작업을 하면서 도로꼬(궤도차)에 흙을 퍼내고는 했어.”
1945년 10월1일 미군이 알뜨르비행장 일대에 설치된 고사포를 파괴했다. 격납고와 각종 건물이 보인다.
농번기에는 마을에서 50명씩 조를 짜 교대로 일을 했다. 송악산 비탈면의 방어선 구축작업에 동원된 문상진씨의 말이다.
“송악산 근처 산이수동에 천막을 치고 삼십몇명이 일했어. 일본군이 한 명 배치돼 감시하고, 우리는 비탈면을 둘러가면서 방어선을 팠지. 미군 전차가 방어선 위로는 못 올라가게 하려는 거라고 들었어.”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가 아버지 대신 동원되는가 하면, 작업을 하다 다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노무동원됐던 강희경씨는 “우리를 고도모부타이(어린이부대)라고 불렀다. 1945년 5월에 아버지가 병환 중이어서 대신 갔는데, 지리를 몰라서 어머니가 데려다 줬다. 한 달 동안 머무르면서 고사포진지 아래 동굴을 우리가 팠다”고 말했다.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알뜨르비행장 일대에 있는 갱도 진지. 허호준 기자
제주시 한림읍 월림리 김성방씨도 15살의 나이에 아버지, 형님과 함께 알뜨르비행장 인근 갱도 진지 구축에 동원됐다. 곡괭이로 땅을 파다가 크게 다치기도 했다는 김씨는 “아버지, 형이랑 함께 동원되는 바람에 집에는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아버지와 같은 함바(노동자 기숙사)에 머물렀는데, 곡괭이로 땅굴을 판 뒤 바닥에 철로를 깔고 도로꼬를 이용해 흙을 실어 옮기는 일을 했다”고 진술했다.
일본군인으로 징집돼 제주도에서 근무한 제주 출신 징병자들도 노동에 내몰렸다. 조선인 징병 1기생 고석돈씨는 알뜨르비행장 옆 단산에 갱도를 파는데 동원됐다. 고씨는 “발파 작업에 배치됐는데, 한번은 작업장에서 나오기 전에 폭약이 터지는 바람에 죽을 뻔한 적도 있다. 게으름을 피우면 일본 군인들이 입을 꽉 다물라고 한 뒤 뺨을 때렸다”고 말했다.
1945년 10월3일 미군이 일본군 무장해제의 하나로 비행기들을 폭파했다.
이날 대정읍 경로당에서 만난 문정선(94)씨는 “알뜨르비행장에 태역(잔디)을 공출했다. 한집당 태역 몇 개씩 할당이 나오면 마을주민들이 그걸 마련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렇게 해서 알뜨르비행장에 태역을 입혔다”고 회고했다.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는 문씨 입에서는 ‘공습경보’나 ‘대일본제국의 신민’을 뜻하는 일본어가 무시로 튀어나왔다.
한국전쟁 때는 비행장 터가 육군 제1훈련소와 중국군 포로수용소로 사용됐다. 해방 뒤 소유권이 국방부로 넘어간 결과였다. 1980년대 후반에는 미국 군사시설 설치 소문이 돌아 ‘송악산 군사기지 반대투쟁’이 치열하게 펼쳐졌고, 1990년대 후반에는 우주센터 건설 계획이 흘러나와 주민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휴가를 얻어 가족들과 함께 올레길을 걷고 있다는 김규철(47·경기도 거주)씨는 격납고를 둘러보며 “제주도에 이런 아픈 역사가 있는 줄 몰랐다. 기념관도 좋지만, 이대로 두고 보존하는 게 더 나을 거 같다”고 했다.
1945년 10월1일 미국이 일본군 전차들을 폭파하고 있다.
제주도는 2008년 이런 역사적 의미가 있는 알뜨르비행장 일대 184만9천여㎡에 격납고와 갱도 진지를 정비하고, 전시관과 추모관 등을 만드는 평화대공원 조성안을 마련한 바 있다. 그러나 계획 면적 가운데 91%인 168만㎡가 국방부 소유여서 15년이 넘도록 사업은 진척이 없다.
현재 대정지역 농민들은 국방부 토지를 임대해 농사를 짓고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감자밭을 다녀오던 정춘옥(83)씨는 “50년 동안 여기서 농사 짓고 있다. 400평(1200㎡)을 임대했는데, 1년에 7만~8만원 정도 내고 있다. 평화공원이니 뭐니, 여러 계획이 나온 거 같은데, 되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오영훈 제주지사는 지난 2월15일 서귀포시를 방문한 자리에서 “송악산 유원지 내 사유지를 매입하고 알뜨르비행장 일대에 추진하는 평화대공원 조성사업을 벨트화하겠다”고 밝혔다. 오 지사의 이런 구상은 제주연구원이 용역연구를 수행한 뒤 최근 제주도에 보고한 내용과 흐름을 같이 한다. 제주연구원은 ‘지속가능한 송악산 관리 및 지역 상생방안’ 보고서에서 송악산 주변 마라해양도립공원과 제주올레 등의 관광자원, 알뜨르비행장 등 일제 군사시설, 4·3 관련 유적지 등을 연계해 ‘송악산 평화대공원’을 조성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일제 강점기 연구자들은 “알뜨르비행장 일대는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의 강제동원 수난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자 4·3과 한국전쟁까지 아우르는 역사적 장소”라며 “건물 위주의 공원 조성보다는 강제동원 노동자와 그 이후의 역사적 과정을 기억하고, 평화를 생각할 수 있는 기념물의 설치를 고려할 만 하다”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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