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지석 경내에 붉은 동백꽃이 피었다. 허호준 기자
어머니는 고무신도 신지 못한 채 맨발로 뛰쳐나갔다. 쓰러졌다 일어서서 손을 뻗었지만, 트럭은 점점 더 멀어졌다. 오빠(부성규)를 실은 트럭은 어머니의 울부짖음을 뒤로한 채 흙투성이 길을 내달렸다. 어머니와 아들이 이 세상에서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82살이 된 부말자씨의 눈에선 눈물이 쏟아졌다. 13일 제주4·3 수형인들에 대한 직권재심 재판이 열린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 부씨의 이야기를 듣던 방청객들이 눈물을 훔쳤다.
“트럭이 와서 큰오빠를 싣고 바다 쪽으로 갔다는 소문만 들었어요. 어머니가 그 얘기를 듣고 달려나갔는데 어머니마저 소식이 끊겼습니다. 가족들이 어머니를 찾아 나서 제주시 용강동의 한 밭에서 숨져있는 어머니를 찾았습니다.”
부씨의 말이 다시 흐려졌다. “발견 당시 어머니는 머리를 심하게 다친 상태였어요. 손발도 묶여 있었고, 얼굴도 많이 훼손돼 있었습니다. 그걸 보니 너무 억울해서…” 부씨는 “어머니 생각을 하면 한없이 서럽고 억울하지만 어디 가서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장찬수 재판장이 “형제는 몇 명이나 되느냐”고 조심스레 묻자 부씨는 “ 4·3으로 어머니와 오빠 4명을 잃었다. 나 하나뿐이다. 언니 둘도 이제는 돌아가셨다. 막내인 나 혼자 살았다. 오늘 법정에서 묻어뒀던 이렇게라도 말을 할 수 있게 돼 조금은 기쁘다”고 했다.
증언대에 선 유족들은 남들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를 짧은 시간이지만 쏟아냈다 . 살아남은 유족들이 이야기할 때마다 유족들의 말은 끊겼고, 방청객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
임신 4개월 때 아버지(한을생)가 육지 형무소(교도소)로 끌려간 뒤 행방불명된 한영자씨의 사연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마음이 아프고 목이 메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공무원이었어요. 토요일에 숙직했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집에 와야 하는데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저를 임신한 상태였어요. 어머니가 찾으러 나섰지만 찾지 못하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었다며 한씨는 말을 이었다. 한씨는 “아버지가 끌려가고 얼마 뒤 대구형무소에서 엽서가 왔다.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저를 임신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구형무소에서 매장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23살에 혼자가 돼 우리를 키우다가 2년 전 94살의 나이로 돌아가셨어요.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우리 남매를 키웠습니다. 오빠는 교통사고로 28년 전에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어머니가 너무 불쌍합니다. 남편이 4·3 때 돌아가시고, 아들마저 잃은 어머니의 심정이 어떻겠어요. 친구들은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저는 한 번도 아버지를 본 적이 없고,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너무 한이 맺힙니다.”
한씨의 이야기에 방청석에서는 손수건을 꺼내는 이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재판장이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편과 아들을 보고 싶어 했겠다”고 하자 “너무 외롭다. 죽은 영혼이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아프지만 한편으로는 (무죄 선고에) 가슴 벅차다”고 말했다.
이날 제주지법 형사4부(재판장 장찬수)는 광주고검 산하 ‘제주4·3사건 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단장 이제관)이 청구한 제13차 직권재심 청구인 30명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장 재판장은 “지난 추석 때 무죄를 선고받은 분들이 판결문을 차례상에 올리는 것을 봤다. 그 의미가 남다를 것이다. 오늘 재판에 참석한 유족분들도 앞으로는 명절이나 제사 때 숨지 말고 떳떳하게 지내기를 바란다”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이날 직권재심으로 명예가 회복된 4·3 희생자는 모두 340명이다.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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