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관련 단체들이 4·3 당시 강경진압을 주도했던 ‘박진경 추도비’에 설치한 감옥 조형물. 허호준 기자
제주4·3 당시 강경진압을 주도했던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인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1920~1948) 추도비에 설치된 단죄 의미의 ‘감옥 조형물’이 철거된다.
제주도보훈청은 박진경 추도비를 둘러싼 조형물이 정당한 사유 없이 공유재산 터에 설치된 시설물이어서 원상복구 명령을 내리기로 했다고 15일 밝혔다. 도보훈청은 원상복구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행정대집행을 통해 조형물을 철거할 계획이다.
박진경 추도비는 1952년 11월7일 ‘제주도민 및 군경원호외 일동’ 명의로 세운 것으로, “제주도 공비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불행히도 1948년 6월18일 장렬하게 산화하시다. 이에 우리 30만 제주도민과 군경원호회가 합동하여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비는 제주시 충혼묘지에 세워졌다가 국가보훈처가 지난해 12월 제주국립호국원 개원을 앞두고 국공유지인 한울누리공원 인근 도로변으로 옮겼다.
앞서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등 도내 16개 단체는 지난 10일 박진경 추도비에 ‘역사의 감옥에 가두다’라는 이름으로 감옥 형태의 조형물을 설치했다. 이들 단체는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추모비를 철창에 가둔다”라고 밝힌 바 있다.
박진경은 4·3 당시인 1948년 5월 초 연대장으로 부임한 뒤 전임자인 김익렬 연대장과는 달리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벌여 5천여명의 도민을 체포하는 등 강경진압을 주도하다가 부하들에 의해 같은 해 6월18일 암살됐다.
박진경을 암살한 손선호는 재판 과정에서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 공격은 전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선무작전에 비하여 볼 때 그의 작전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화북이란 부락에 갔을 때 15세 가량 되는 아이가 그의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살해했다”며 “사격연습을 한다고 하고 부락의 소, 기타 가축을 난살하였으며 폭도가 있는 곳을 안내한 양민을 안내처에 폭도가 없으면 총살하고 말았다. 또 매일 한 사람이 한 명의 폭도를 체포해야 한다는 등 부하에 대한 애정도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김익렬 연대장도 훗날 “박 연대장은 연대장 취임식 자리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독립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역설했다”고 기록한 바 있다.
4·3 단체들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 미화한 추도비를 철거하거나 단죄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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