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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람들은 굿이나 보주마는 우리 가슴은 누게가 달래줄건고”

등록 2021-11-15 15:50수정 2021-11-15 15:54

제주민예총, 대정에서 4·3 희생자 넋 추모 굿
서순실 심방 굿 집전…생존자 할머니 증언 눈물
제주큰굿보존회 서순실 심방이 지난 13일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기념관 앞터에서 ‘대정 읍오리 해원상생굿’을 집전하고 있다.
제주큰굿보존회 서순실 심방이 지난 13일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기념관 앞터에서 ‘대정 읍오리 해원상생굿’을 집전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언니가 총살당하던 날, 그날은 집에 있는 아이들까지 모두 홍살문 거리로 나오라는 명령이 내려졌어. 언니와 나도 같이 갔어요. 세 살 위 언니와 제가 키가 비슷했어요. ‘누가 성(언니)이냐?’ 경찰의 다그침에 겁이 나서 대답할 수 없었어요. ‘제가 성입니다.’ 할아버지와 언니는 홍살문 거리에 남겨두고 저를 동헌터로 보냈어요. 그곳에 마을 사람들하고 같이 앉아있었는데 할아버지와 언니, 그리고 모아놓은 마을 사람들을 몰아왔어요. 우리 앞에 딱 세워놓더니 ‘팡! 팡! 팡!’ 그게 전부였어요.”

1948년 11월20일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대정고을 안성리 이른바 동헌터 학살사건은 이렇게 일어났다. 73년 만에 공개적으로 용기를 내 입을 연 고정자(89) 할머니의 말에 이를 지켜보던 이들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고 할머니와 대담한 조정희 제주4·3평화재단 기념사업팀장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고 할머니의 세 살 위 추자 언니는 당시 20살이었다. 꽃다운 나이의 언니는 아버지가 도피했다는 이유로 할아버지와 함께 희생됐다.

대정 읍오리(인성, 안성, 보성, 구억, 신평) 마을에서만 4·3 희생자는 218명에 이른다. 4·3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대정 읍오리 해원상생굿’이 지난 13일 대정읍 추사관 부근 공터에서 열렸다. 이날 굿은 70여년 떠돈 4·3의 넋을 위로하는 자리였다. 제주민예총이 주관한 ‘찾아가는 현장위령제’로, 올해로 열아홉 번째 굿판이다.

대정 읍오리의 해원상생굿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대정은 조선 말기부터 폭정에 시달리던 민중들이 노도처럼 일어났던 민란의 진원지이자, 20세기 벽두인 1901년 신축항쟁이 일어난 곳이다. 이날 행사가 열린 바로 옆에는 신축항쟁의 ‘장두’들을 기리는 ‘대정삼의사비’가 있다.

지난 13일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기념관 앞터에서 열린 해원상생굿에서 4·3 당시의 체험을 증언하는 고정자 할머니.
지난 13일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기념관 앞터에서 열린 해원상생굿에서 4·3 당시의 체험을 증언하는 고정자 할머니.

굿은 제주큰굿보존회와 제주전통공연예술팀 마로가 동헌터, 인성리 사만질 앞 밭 등 학살터에서 영혼을 불러내 모셔오는 ‘초혼풍장’을 시작으로 서순실 심방이 굿을 집전했다. 서 심방의 굿은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가도록 기원하는 ‘시왕맞이’로 이어졌다.

“인간은 산 때 사람이주. 진토되엉 가민 천년을 가도 오람수과. 만년을 가도 오람수과. 산사람들은 굿이나 보주마는 우리 가슴은 누게가 달래줄건고.”(인간을 살아 있을 때 인간이지, 흙이 되면 천 년을 가도 오시나요. 만년을 가도 오시나요. 살아있는 사람들은 굿이라도 보지만 우리 마음은 누가 달래줄거나)

서 심방이 죽은 이들을 대신해 읊조리자 이를 지켜보던 할머니들은 연신 두 손을 모으거나 눈시울을 닦는 모습이었다. 행사에서는 김경훈·강덕환 시인 등의 시 낭송과 문석범 소리꾼의 소리, 마로의 공연 등이 이어졌다.

고 할머니는 대담을 마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살고 낼은 죽었구나 핸. 살아지카부덴 안 핸.”(오늘 살면 내일은 죽겠지 했어. 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

지난 13일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기념관 앞터에서 열린 해원상생굿에서 조정희 제주4·3평화재단 기념사업팀장이 고정자 할머니와 대담하고 있다.
지난 13일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기념관 앞터에서 열린 해원상생굿에서 조정희 제주4·3평화재단 기념사업팀장이 고정자 할머니와 대담하고 있다.

조 팀장은 “고 할머니가 평소 둘 만의 대화에서는 말씀을 잘하셨는데 공개적인 자리여서 조금은 긴장하신 것 같다”며 “할머니 말씀 중에 ‘길이 어시난 혼질로 걷고 물이 어시난 혼물 먹엉 살았주’(길이 없어서 같은 길로 다녀야 했고, 다른 물이 없으니 같은 물을 먹으면서 살았지)라는 말이 먹먹했다”고 말했다. 일곱 식구 가운데 자신을 포함해 셋만 살아남은 고 할머니의 말은 이른바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남겨진 두 동생과 함께 살아오면서 모진 일들을 감내해야 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종일 굿을 지켜본 고 할머니의 동생 고정팔(83)씨는 “4·3 때 희생된 분들의 넋을 위로하는 굿을 보니 마음이 후련하다. 누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형 제주민예총 이사장은 “4·3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제주섬 서남부의 뿌리고을로 다시 한 번 비상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학살터에서 4·3으로 희생된 읍오리 주민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해원상생굿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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