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의 외아들인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이 25일 광주시 동구 광주아트홀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연극 <애꾸눈 광대>를 관람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5일 밤 광주 동구 광주아트홀.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연극 <애꾸눈 광대> 공연이 끝난 뒤 객석이 술렁였다.
원작자인 이지현씨가 연극을 본 소감을 듣는다며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인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을 소개하려 하자 관객들 사이에서 “아버지 노태우의 사죄가 먼저다”, “광주학살 원흉 5적의 자식”, “다시는 광주에 오지 말라”는 항의들이 쏟아졌다. 노 원장은 “본의 아니게 소란을 일으키고 분란을 일으켜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공연장을 나섰다.
이날 노 원장의 광주 방문은 지난 4월21일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은 지 한달여 만이었다. 그는 2019년 8월부터 지난달까지 다섯차례 광주를 찾았다. 망월동 옛 묘역과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오월어머니집 등을 방문해 사죄하기도 했다. 노태우씨는 지난해 5월에는 노 원장을 통해 조화를 보내기도 했다. 노씨 부자의 ‘5·18 행보’를 두고 처음엔 시민들 사이에서 “신선하다”, “전두환 부자와 비교하면 더 낫다” 등 긍정적인 평가가 나왔다.
<제5공화국 전사>엔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의 당시 5·18 행적이 소상하게 기록돼 있다.
하지만 시민들은 지난 4월 이후 노 원장의 광주 방문을 떨떠름하게 보기 시작했다. 5·18기념재단과 5·18 관련 3개 단체는 지난 3일 성명을 내어 “진정성 없는 보여주기식 반성 쇼를 중단하라”고 비판했다. 그간 몇차례 광주를 방문한 노 원장이 ‘<노태우 회고록>을 개정하고, 진실 규명에 협조하겠다’고 밝혔지만 어떤 조처도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979년 12·12 사태 때 자신이 사단장으로 있던 9사단 병력을 동원해 육군사관학교 동기인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함께 쿠데타를 주도하고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영전한 노씨는 신군부 핵심 실세였다.
일부에선 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기소돼 처벌받은 전씨에 비하면 반란·내란 중요임무 종사 등의 혐의로 기소된 노씨가 5·18에서 상대적으로 책임이 덜한 것 아니냐고 말한다.
하지만 신군부가 집권 뒤 집필해 1급 비밀로 구분해 보안사령부 금고에 보관했던 <제5공화국 전사>(1981)엔 노태우 수경사령관의 5·18 행적이 소상하게 기록돼 있다. 5공전사 4권 1653쪽엔 “(자위권 발동을 건의한) 80년 5월21일 국방부 장관실엔 장관을 비롯해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 수경사령관 노태우 장군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 노태우씨는 회고록(2011)에서 “5·18 당시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시민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를 듣고 시민들이 저항했다”고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왜곡하기까지 했다.
1996년 8월 26일 수의를 입고 선고 공판을 기다리는 두 전직 대통령, 전두환과 노태우. 사진공동취재단
그런데도 노 원장은 5·18단체의 지적을 외면하고 또다시 광주에 왔다. 5·18 때 아버지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이야기하지 않고 뭉개면서 광주를 찾는 아들의 모습에선 더 이상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노 원장은 “언론을 통한 물타기 대리 사죄로는 죄업을 덮을 수 없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이길 바란다. 노태우씨 쪽이 5·18 관련 자료부터 공개하고 진상 규명에 힘을 보탠다면 광주시민들은 진심으로 박수를 보낼 것이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