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희생자 전재수군(오른쪽 둘째)이 초등학교 입학을 기념해 찍은 가족사진. 전군 가족은 최근 이 사진을 발견해 묘지 영정사진으로 쓸 계획이다.5·18유족회 제공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얼굴없는 희생자’ 전재수(11)군의 사진이 41년 만에 발견됐다. 5·18단체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전군의 영령이 조금 이마나 위로받기를 기원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는 “다음달 5일 어린이날을 맞아 국립5·18민주묘지 전군의 묘비에서 영정사진 제막식을 연다”고 29일 밝혔다.
대표적인 5·18 어린이 희생자로 꼽히는 전군은 생전 사진을 찾지 못해 묘비와 유안봉안소 등에는 무궁화 사진이 대신 걸려 있었다. 전군의 큰형 재룡(60)씨는 올해 초 아버지 유품에서 전군이 나온 가족사진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1978년 전군의 초등학교 입학을 기념해 새 옷을 입은 전군과 아버지, 고모 3명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3남 2녀 중 넷째였던 전군은 세 살 터울 막내 여동생과 함께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재룡씨는 “재수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 유독 귀염을 받았다. 동생이 죽은 후 어머니는 1984년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2000년 64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셨다. 그동안 동생 사진 한장 찾지 못해 한이 됐는데, 올해 초 아버지 기일(음력 1월24일)에 유품을 정리하다 아버지 사진 뒤쪽에 동생이 나온 사진이 겹쳐 있는 걸 발견했다”고 말했다.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학교 휴교령으로 내려지자 광주 효덕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전군은 집에 머물고 있었다. 5월24일 집앞 야산에서 친구들과 놀던 전군은 도로에 군인 행렬이 지나가자 손을 흔들었다.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던 11공수여단이었다. 군인들은 전군 쪽을 향해 총을 난사했고 총소리에 놀란 전군은 도망가다 고무신이 벗겨졌다. 이에 뒤돌아 신발을 줍는 순간 총알이 전군 가슴, 다리 등을 관통해 바로 숨졌다.
국립5·18민주묘지 전재수군의 묘.<한겨레>자료사진
아직 누가, 왜 전군을 쐈는지와 발포 명령자 등은 규명되지 않고 있다.
광주 5월항쟁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저자인 이재의씨는 “당시 비행장으로 철수하던 11공수여단이 방광범(12)군에 이어 전군을 사살한 것으로 봤을 때 무차별 사격 지시를 받은 것 같다. 이후 육군보병학교 교도대와 오인사격을 벌여 부대원 9명이 즉사하자 분풀이로 인근 민가에 있던 민간인 5명(추정)을 학살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전군 주검은 광주 망월동 묘역에 안장됐다가 1997년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박현옥 5·18유족회 사무총장은 “많은 참배객이 전군 묘비의 무궁화 사진을 볼 때마다 가슴 아파했다. 이제라도 사진을 찾아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 희생자 898명 중 얼굴 사진 대신 무궁화 사진이 걸려 있는 묘비는 모두 49개다. 전군을 포함한 5·18 학생 희생자는 18명, 미성년 실종자는 15명이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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