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6월7일 조선대병원에서 작성한 4살 추정 어린이의 검시 기록.
무덤 빗돌엔 이름이 없다. 지난 27일 오후 찾은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4-97 ‘무명열사’ 묘 봉분엔 잔디 보호막이 쳐져 있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지난 19일 유전자 검사용 검삿감(시료)을 다시 채취하려고 묘지를 개장한 뒤 새 봉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무덤의 주인은 ‘4살로 추정되는 남자 어린이’다. 1980년 5·18 직후 망월동 구묘역에 묻혔던 주검은 2002년 신묘역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전남대 법의학교실이 유골 감정을 통해 주검의 나이와 성별을 가려냈다.
“아, 생각나지요. 산 등서리(등어리)에다 묻어놨더라구요. (주검이) 쬐깐해. 뺏뺏하고. 보실보실한 마사토 땅에 누군가 묻어논 거여.”
광주시청 사회과 공무원이던 조성갑(78)씨는 4살 아이의 주검을 수습했던 때를 소상하게 기억했다. 조씨는 1980년 5월 10일간의 항쟁(5월18~27일)이 끝난 뒤 자신의 업무가 아닌데도 한달여 동안 계엄군이 몰래 묻어놓은 주검 41구를 수습했던 인물이다. 5·18 때 시위에 참여했던 조씨는 항쟁이 끝난 뒤 ‘어디엔가 시신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쫓아갔다. 조씨는 광주시 남구 효덕초등학교 건너편 야산(광주대로 바뀐 당시 인성고 앞)에서 4살쯤 된 남자아이의 주검을 발견했다.
광주시청 사회과 전 직원 조성갑씨가 지난 26일 광주시 남구 효덕초등학교 건너편 순환도로에서 4살 아이의 주검을 수습했던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
조씨는 주검을 조선대병원으로 옮겼다. 1980년 6월7일 조선대병원 의사가 기록한 검시 기록을 보면, 사망 원인은 ‘좌후경부 맹관 총상’이다. 왼쪽 뒷목(좌후경부)에 탄알이 박힌 채 사망(맹관 총상)했다는 뜻이다. 검안 의사는 ‘검시일로부터 10~15일 전 사망 추정’이라고 적었다. ‘밤색 여자 세타(스웨터)로 싸고 한은(한국은행) 1000원권 1매가 들어 있었음’이라는 사연도 적혀 있다.
검시 기록엔 ‘사망자를 30대 여성이 군 짚차(군인 지프차)에 싣고 와서 효덕동 소재 인성고등학교 앞산에 매장하고 그 차로 갔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이 내용은 서광주경찰서 소속 김아무개 순경이 진술한 내용이다. 그동안 무명열사 주검 11구 가운데 6구는 2001~2006년 유전자 검사를 통해 가족을 찾았다.
하지만 이 4살 아이 주검을 포함한 5명만은 여전히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만원씨 등 5·18 왜곡 세력은 무명열사 묘 11기가 5·18 때 북한에서 내려온 특수군의 묘지라는 황당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 전두환(89) 전 대통령이 2017년 4월 낸 <회고록>에도 5·18 때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5·18민주유공자 이동춘 목포과학대 교수가 지난 27일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4살 아이가 묻힌 무명열사 무덤에서 참배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주검의 주인이 1980년 5월 옛 전남도청에서 목격된 아이일 수도 있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동춘(61) 목포과학대 교수(사회복지학과)는 “무명열사 묘지에 묻혀 있는 아이가 80년 5월27일 옛 전남도청 앞에서 봤던 그 아이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옛 전남도청에서 총을 들고 저항하다가 붙잡힌 그는 “도청 앞마당으로 끌려갔는데, 먼저 와 있던 남녀 고등학생 2명이 네다섯살 정도의 남자아이를 건넸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아이를 안은 채 상무대 영창에 도착한 뒤 헌병에게 아이를 인계했다. 이 교수는 “10년 전께 친동생이 5·18 때 상무대 헌병이었던 한 지인한테 ‘시민군이 안고 왔던 아이를 기억한다. 군 막사에서 보호하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사라져 군에 비상이 걸렸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5·18 시민군 기동타격대원이었던 염동유씨가 29일 광주 옛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에게 붙잡히기 전 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던 장소를 지목하고 있다.
5·18 때 시민군 기동타격대원으로 활동했던 염동유(63)씨도 5월27일 새벽 옛 전남도청에서 군인들에게 붙잡히기 직전 민원실 쪽에서 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군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 뒤 아이의 생사가 궁금했다는 그는 “그때 군인들이 어린아이까지 죽였다면 천벌을 받을 짓”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은 추측일 뿐이다. 도청에 있던 그 아이가 무덤의 주인공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향후 5·18 진상규명 과정에서 밝혀야 할 과제다.
사람은 사라졌지만 주검을 찾지 못한 5·18 행방불명자 78명 중 10대 미만 희생자는 이창현(7)·박광진(5)군 등 2명이다. 그러나 이들 2명의 가족들과 무명열사 묘에 묻힌 4살 추정 어린이의 유전자는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나왔다.
글·사진 정대하 김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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