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나주배박물관에서 강인규(맨 가운데) 나주시장을 비롯한 공무원들과 ‘피어나라 나주배사람들’ 회원 주민들이 민관 합동 간담회를 열었다. 왼쪽부터 반진곤 회장과 회원 이향미·김준·나종필씨, 강 시장, 나주시 공무원 김종순·형남열·허영순·김정남씨. 주민 회원으로는 양정원·이병곤·장재훈·조성광·황덕연씨 등 1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
‘봄이면 새하얀 배꽃과 분홍빛 복숭아꽃이 천지에 만발한 꽃대궐 풍광은 우리 나주에서만 볼 수 있어요. 100년 넘은 과수농원들이 광활한 배꽃정원 속의 케어팜단지로 새로 피어나 세계적인 생태관광 명소가 되는 날을 함께 꿈꿔요.’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배 산지인 전남 나주시 주민들이 ‘나주배 국가중요농업자산’ 지정을 위해 똘돌 뭉쳤다. 특히 가장 과수농원이 많은 금천면 일대 주민들 중심으로 나주배연구모임 ‘피어나라 나주배사람들’을 꾸려 자발적으로 추진해 눈길을 끈다.
지난 19일 금천면에 있는 나주배박물관에서는 강인규 나주시장과 농업유통센터 실무자 등 공무원들과 나주배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국가중요농업유산 지정 위한 간담회’를 열었다. 코로나19 탓에 잠시 미뤄지긴 했지만, 농림수산식품부 농업유산자문위원회의 ‘국가중요농업유산 지정 관련 현장조사’에 대비해 지난 1년6개월 동안의 준비 상황을 최종 점검하는 자리였다.
삼한시대부터 배 재배 기록이 있는 전남 나주시에는 지금도 곳곳에 수백년생 토종 배나무들이 자생하고 있다. 왼쪽부터 300~400년생으로 추정되는 나주 공산면 가송리와 다도면 도동리 돌배나무, 가장 오래된 110년생 과수목인 나주 노안면의 배나무. 사진 나주 배박물관 제공
지난 4월말 전국 최대 배산지인 나주시 금천면 일대 과수농원에 새하안 배꽃과 분홍빛 복숭아꽃이 만발해 아름다운 꽃대궐을 연출하고 있다. 노령화된 배나무들을 뽑아내버려 텅 빈 주황빛 황토밭이 대조적이다. 사진 김경애 기자
“다 아다시피, 나주배는 예로부터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진상품이었고, 지금도 2200여 농가에서 전국 생산량의 23%를 차지하며 세계 각국에 수출하는 우리 시의 주력 산업입니다. 마침 농식품부에서 ‘케어팜’을 농업 선진화와 고령농민의 복지를 동시에 이루는 6차산업으로 키우기로 한만큼 오래된 배농원을 유산으로 보존해 활용하는 방안이 높은 평가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강 시장) “선친의 가업을 이어 평생 배농사를 지어왔고 후대에도 물려주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노령화된 과수목들을 재생시키고 한편으로 보존도 해야 하기 때문에 국가적인 지원이 필수적입니다.”(반재곤 피어나라 나주배사람들 회장) “지난 2010년 금천면 일대 배산업 특구 지정을 통해 ‘신화’ 같은 기후변화에 강한 신품종 개발 등 과수농법 혁신작업은 꾸준히 진행중입니다. 앞으로 나주배의 명성과 자긍심을 이어가려면 생태문화적 가치까지 인정받는 농업유산 지정이 중요합니다.”(나종필 필농원 대표) “나주는 400~500년생 토종 배나무들이 상징하듯 역사성이 월등하고, 1910년대부터 본격화된 과수농으로 농업기술도 앞서 있으며 특별한 경관에 주민참여도까지 이렇게 높아 농업유산의 요건을 두루 갖춘 셈입니다.”(김종순 학예연구사)
‘국가중요농업유산’은 지난 2013년 ‘농림어업인 삶의 질 향상과 농산어촌개발 촉진에 관한 특별법’(국가중요농업유산의 보전과 활용)에 따라 100년 이상 농업·농촌지역 환경과 사회, 풍습 등을 대상으로 유·무형 농업자원을 지정해 지원하는 제도이다. 현재 모두 15개가 지정됐는데 전남이 5개로 가장 많다. 완도 청산도 구들장논, 구례 산수유농업, 담양 대나무밭, 보선 전통차 농업시스템, 장흥 발효차 청태전 농업시스템 등이다. 국가농업유산 가운데 일부는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의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도 인정받았다.
조선시대부터 왕실 진상품으로 명성을 얻은 나주배는 지금도 전국 최다 면적과 최대 생산량을 자랑한다. 하지만 과수농민들의 고령화로 폐업도 늘고 있어 활성화와 보존을 위한 국가농업유산 지정이 시급한 상태이다. 사진 나주 배박물관 제공
지난 4월 가지치기를 하지 않은 덕분에 무성한 배꽃터널을 이룬 나주 금천면의 한 과수농원.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되면 노령화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배나무밭을 이처럼 배꽃정원으로 살려 팜케어 등 생태탐방 명소로 활용할 수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
“지난해 봄 배꽃 과수원길에서 ‘이화에 월백하 듯’ 밤 산책을 즐기다가 문득 깨달았어요. 고령으로 더 이상 농사를 짓기 힘든 주민들이 늘어나면서 배나무를 모두 뽑아내 붉은 황토밭만 드러난 곳이 늘어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가지 치기를 하지 못한 채 방치된 곳에서는 수십년생 고목들이 무성한 배꽃터널을 연출하고 있더군요. 다 사라지기 전에 이 아름다운 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이향미 피어나라 나주배사람들 회원) ‘피어나라 나주배 사람들’은 이런 생각에 공감한 과수농원 대표들을 중심으로 10여명의 주민들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나주배사람들은 지난해 4월 나주시의회(의원 이상만)를 통해 농업유산 지정 신청을 위한 연구조사 지원을 요청했고, 올들어 나주배박물관의 공개입찰을 통해 남도학연구소(대표 서혜숙)가 연구 용역을 맡아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를 바탕으로 나주시는 지난 6월 농업유산 지정 신청을 한 데 이어 7월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배연구소·호남원예고·나주배원예농협·나주배사람들·남도학연구소 등 5개 기관과 ‘나주배 국가중요농업유산 지정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전임 시장인 신정훈 국회의원과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배연구소 강삼석 소장도 적극 후원하고 있다.
부친의 가업을 이어 1985년부터 배농사를 짓고 있는 나주 필농원(대표 나종필)에서는 1990년대초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4월 개화기에 배꽃축제를 열어 ‘이화에 월백하고’의 정취를 나누고 있다. 사진 필농원 제공
“요즘 젊은층에게까지 인기 있는 ‘나주곰탕’ 식도락 여행과 배꽃농원 농업유산단지 생태문화탐방을 연결한다면 나주혁신도시의 첨단 이미지와 더불어 삼한시대 이래 남도의 도읍지인 나주의 위상을 한껏 높일 수 있을 겁니다.”
이날 간담회 참석자들은 나주 특산배인 ‘금촌추’를 저마다 한 손에 들고 “나주배 농업유산 영원히”를 다짐했다.
나주/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나주배 국가중요농업유산 지정을 위해 나주시·나주시의회·나주배밭사람들·나주배원예농협·나주배포럼 등 민관이 힘을 모아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사진 나주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