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해남에서 ‘해남 오구굿판’ 연 박양희·박필수씨
굿을 올리던 날, 하늘이 눈부시게 푸르렀다. 전남 해남 두륜산 투구봉 아래 터에 굿청이 차려졌다. 굿청 밖엔 금줄이 쳐져 있었다. 보조무들이 종이로 만든 넋 형상을 대나무에 단 신대를 굿청으로 옮겼다. 그제야 사람들도 손을 씻고 굿청에 입장했다. 굿청엔 음식이 차려졌고, 황색천을 대나무로 세운 천막이 ㄷ자형 관객석을 만들었다. 지난 17일 오후 5시30분 해남군 북일면 흥촌리 에루화헌 명상터에서 해남굿이 펼쳐졌다. 코로나 시대, 굿을 통한 치유의 자리엔 100여 명만 참석할 수 있었다.
굿판이 열린 에루화헌은 치유 음악인 박양희(53) 대표가 운영하는 공간이다. 전남대 노래패 ‘횃소리’ 출신의 연주자였던 박 대표는 1995년 한국을 떠나 인도 샨티니케탄(평화의 마을이라는 의미)으로 갔다. 시성 타고르(1861~1941)가 노벨문학상 상금과 사재를 털어 만든 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일종의 이상촌으로 알려진 곳이다. 샨티니케탄 등 인도 곳곳을 돌며 춤과 노래로 수행하는 ‘바울’로 살았던 그는 8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치유 음악인으로 활동해왔다. 2014년 해남에 왔다가 정착한 박 대표는 노래패 활동을 함께한 동료들이 설립한 ㈜에프에이모스트가 마련한 공간(2만8760㎡)에 1년 전 에루화헌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박 대표는 “하늘로 푹 솟은 투구봉이 보이는 이곳은 묘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에루화헌은 게스트하우스이자 예술교육과 워크숍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날 굿판은 시화풍정 담소와 문화예술진흥사업단 등이 힘을 모아 열었다. 시화풍정 담소는 박 대표가 소리꾼 이병채(진도 국악고 교장), 가수 한보리·이우정·오영묵 등 해남 문화·예술인들과 2015년 결성한 모임이다. 시화풍정 담소가 낸 ‘평화의 시마을 해남-한국 해남과 인도 샨티니케탄의 만남’이라는 프로젝트는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의 올해 지역 우수 문화교류 콘텐츠 발굴·지원사업에 선정됐다. 해남 지역 문화 콘텐츠를 인도에 알리고, 두 지역이 문화교류를 활성화하자는 취지의 기획이다. 박 대표는 “시인 타고르의 고향인 샨티니케탄과 김남주·김준태·고정희 시인을 배출한 해남이라는 공간을 시를 통해 접점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원래 시화풍정 담소는 해남굿 지무들과 샨티니케탄을 찾아 굿판을 벌일 참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현지 방문 길이 막혀 ‘비대면 문화교류’를 하고 있다. 이날 해남에서 펼친 굿도 영상으로 담아 샨티니케탄으로 보낼 계획이다. 또 해남 시인들의 시와 해남을 노래한 시들을 모아 낭송해 시노래 콘텐츠로 제작해 인터넷 누리집에 올리고 있다. 해남 아트빌 어린이집 어린이들은 올 한해 모은 돼지 저금통을 털어 샨티니케탄 고아원에 기부할 방침이다. 올 12월엔 해남에서 문화공연을 해 생방송으로 보내고 샨티니게탄에서도 문화공연 영상을 보내기로 했다. 박 대표는 “코로나가 풀리고 연속 지원사업으로 결정되면 인도를 꼭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양희 대표 운영 에루화헌에서
시화풍정 담소 등 6시간 치유굿
인도에서 8년 춤과 노래로 수행
박필수 해남군고보존회 회장
사회운동 뒤 귀향해 문화운동
굿판 마지막 의례 ‘중천’ 주재
이날 12거리 굿판엔 오춘자·김국향·박필수씨 등 3명이 섰다. 오춘자(79)씨는 완도 노화도 출신으로 해남 남창으로 이주해 세습무 굿을 잇고 있는 명인이다. 해남굿은 다른 지역보다 오구굿(바리데기굿)이 특징적이다. 진설-안당-손님굿에 이어 영혼을 모시는 ‘선부리’ 대목이 끝난 뒤 해남굿의 하이라이트인 오구굿이 이어졌다. 지무가 연행하는 동안 관객들이 시루에서 명줄을 잡아당기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는 굿판엔 신명이 이어졌다.
이날 굿판 마지막 ‘중천’ 의례를 주재한 박필수(55) 해남군고보존회 회장은 전라도 굿판에서 보기 드문 남자 지무다. 서울·광주 등지에서 사회운동을 하던 그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고향인 해남 땅끝마을 송지면으로 귀향했다. “세상이 바뀌려면 정치·변혁운동뿐만이 아니라 서로 나누고 즐기는 문화가 세상의 바탕을 이뤄야 한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박 회장은 해남·고흥·완도 등 남해안에서 이어오던 풍물을 일컫는 ‘군고’를 동네 어르신들한테 배워 1992년 해남군고보존회를 결성했다. 해남군고보존회는 해남 지역 14곳 읍·면 주민 500여 명이 풍물을 익혀 마을 ‘군고패’를 만드는 데 튼튼한 밑돌이 됐다. 그는 “주민이 전문 연희자 공연의 구경꾼이어서는 안되고 문화를 즐기는 주체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회장이 기획에 참여해 열린 공재 윤두서 문화제나 미황사 괘불재음악회 등엔 자주 군고패 주민들이 출연하고 있다.
20대 중반부터 굿판 악사로 다니며 큰 무당을 만났던 그는 악기 연주뿐 아니라 지무들이 하는 굿을 직접 배우기 시작했다. “고령의 지무 선생님들이 하룻밤 자고 나면 돌아가셨고, 굿판을 이을만한 사람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정 안되면 나라도 배우자”고 남자 지무의 길을 선택해 이젠 밤새워 하는 굿을 거뜬히 이끄는 굿쟁이가 됐다.
박 회장은 이날 넋올리기-고풀이-씻김-길닦음에 이은 마지막 거리인 ‘중천’을 직접 주재했다. 처음 굿판이 시작될 땐 서먹해 하던 관객들은 지전을 들고 춤을 추며 참여해 굿판의 신명을 북돋웠다. 박 회장은 “굿엔 긴 시간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가슴을 꿈틀거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코로나로 지친 사람들뿐 아니라 구천을 헤매는 영혼들을 잘 모시는 굿을 올리면 우리가 행복해진다”고 말했다.
글·사진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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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 에루화헌 박양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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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전남 해남군 북일면 에루화헌 명상터에서 열린 공연 때 노래하는 박양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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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군고보존회를 결성해 풍물 운동을 하면서 해남굿을 배워 연행하는 남자 지무 박필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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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전남 해남 북일면 에루화헌 명상터에서 열린 굿판에 나선 박필수 해남군고보존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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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전남 해남군 북일면 에루화헌 명상터 굿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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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전남 해남군 북일면 에루화헌에서 열린 해남굿의 제석굿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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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전남 해남군 북일면 흥촌리 에루화헌 명상터에서 열린 해남굿판에서 관객들이 지전을 들고 춤을 추며 흥겨워하고 있다. 박희성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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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전남 해남군 북일면 에루화헌에서 열린 굿판에 선 김국향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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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전남 해남군 북일면 에루화헌에서 열린 굿판에 선 오춘자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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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전남 해남군 북일면 에루화헌에서 열린 해남굿을 지켜보는 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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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군 북일면 흥촌리 에루화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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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전남 해남군 북일면 에루화헌에서 보조무들이 신대를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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