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2 때 4·19참여…대학 때 한일회담 반대시위 80년 ‘서울의 봄’ 때 다시 ‘역사의 소용돌이’로 보안사 조작수사로 내란수괴 내몰려 사형 선고 2년8개월 복역 뒤 풀려나 광주시민운동 중심 구실
1980년 8월 내란수괴로 사형을 선고받은 군사법정.
“누구를 미워할 겨를도 없었제. 내란수괴는 평생 감당하기 버거운, 무겁고 무거운 짐이었지. 욕먹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 채찍질을 해야 했어.”
5·18 사형수 정동년(77)은 1980년 5월 37살의 전남대 복학생이었다. 한-일 회담 국회 비준을 반대하다 22살에 퇴학당한 지 15년 만에 겨우 대학으로 돌아갔다. 이미 유명 기술학원의 강사로 일하고 있었고, 6년 전 결혼해 두 아이를 둔 아빠였다.
신군부는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책임을 들씌울 희생양을 찾아 나섰다. 김대중과 5·18을 엮어 내란으로 몰아갈 고리가 필요했다. 동교동 자택의 방명록에서 이름이 확인된 그가 마침 예비검속으로 상무대 영창에 붙잡혀 있었다.
“전남대 총학생회가 ‘김대중씨를 강연에 초청하고 싶다’며 선배인 저한테 교섭을 부탁해왔어요. 80년 4월12일 이런 의사를 전하러 동교동에 갔다가 만나지도 못하고 이름만 남겨두고 왔죠. 이 방명록에 이름을 쓴 것까지는 사실이고, 나머지 ‘김대중한테 500만원을 받아 광주에서 내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완전히 소설이에요.”
신군부의 각본 짜맞추기는 모질고 험했다. 각목으로 무릎을 짓이기고, 곤봉으로 온몸을 마구 때리는 등 무자비한 고문과 구타를 자행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뭇매에 내몰려 억지 진술을 하고 나니 어떻게 썼다고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수사를 중단시키지 않으면 피해자가 숱하게 늘어날 판이었다. 그는 배식 때 손잡이가 부러진 군용숟가락을 숨겨두었다가 시멘트 바닥에 갈았다. 날카로워진 숟가락을 들고 영창 화장실로 몰래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복부와 손목을 마구 그었다. 이렇게 자살까지 시도하며 저항했지만 각본 수사는 멈추지 않았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내란수괴 혐의를 뒤집어썼다.
5·18 사형수 정동년은 5·18 민주화운동 40돌을 맞아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광주를 만드는 마지막 꿈을 가꾸고 있다”고 말했다. 안관옥 기자
80년 10월 그는 푸른 수의를 입고 군사법정에 섰다. 헌병 10여명이 무장한 채 법정 안까지 들어왔다. 숨 막힐 듯한 긴장감 속에서 그는 담담하게 사형선고를 받아들였다. 예상한 대로 1심, 2심, 3심 줄줄이 사형이었다. 수감 중인 송기숙·명노근 등 전남대 교수들도 “명색이 교수인데 학생 밑에서 내란을 했다고? 우리가 수괴면 수괴지 어떻게 학생이 내란 수괴냐”고 당국을 비웃었다.
그는 평소 사형수 이미지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온화하고 차분하고 부드러운 성품이다. 광주 충장로에서 시계점을 운영하던 아버지 덕분에 집안 형편도 비교적 여유로웠다. 외조부 노형규가 일제에 맞섰던 독립유공자라는 사실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이런 집안 내력으로 평소엔 너그러운 편이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기 일쑤였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60년 4·19혁명이 터졌다. 그는 광주 시내로 진출해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경찰의 발포로 중학생이 바로 옆에서 숨지는 장면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선배였던 이홍길 전 전남대 교수, 박석무 전 국회의원, 홍갑기 전 고교 교장 등은 6·3시위에도 함께 참여해 평생 동지가 됐다. 전남대 화학과에 입학한 그는 64년 6월3일 한-일 굴욕외교 반대 시위에 나섰고, 이듬해 총학생회장이 되어 한-일 회담 비준 반대 투쟁을 이끌었다. 결국 졸업을 6개월 앞두고 제적과 수감, 징집으로 이어지는 가시밭길을 걷게 됐다.
1982년 12월24일 사형수 정동년이 형 집행 정지로 출소하고 있다.
“한-일 굴욕외교를 반대했다고 학군후보생(ROTC)에서 제적됐어요. 이왕 시작했으니 제대로 시위를 해보자고 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했어요.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아마 장교로 제대하고 실험실 기사나 화학과 교사로 평범한 일생을 살았겠지요.”
석달 동안 첫번째 징역을 살고 난 그는 곧바로 강원도 양구의 21사단 소총수로 강제징집됐다. 그는 일일감시 대상이었다. 제대할 때까지 전혀 낌새를 채지 못했다. 제대 직전 방첩대원이 그를 불러 속사정을 알려줬다.
“‘이제 살 거 같다’고 했다. 연대장과 당신, 두 사람이 일일보고 대상이었는데 내내 똑같은 말만 쓰기가 얼마나 지겨웠는지 모른다고 했다. 데모 한번 했다고 3년 내내 감시를 하는 세상에 소름이 확 끼쳤다.”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던 그는 일찌감치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공학도답게 서울 광운전자, 전남 나주 세창화학 등에서 일했다. 74년 은행원이던 이명자(70·오월어머니집 관장)씨를 만나 결혼했다. 이씨는 남편 한마디에 눈물을 찔끔거리곤 하는 순해빠진 여성이었다. 결혼할 때 그가 운동권인 줄도 몰랐다. 그냥 촉망받는 전자회사 전무이사라고만 믿었다.
1974년 결혼 이후 신혼 시절.
“결혼한 뒤엔 아내 덕분에 징역을 편하게 살았죠. 천하의 순둥이가 어느새 투사로 변모해 있었어요. ‘죄 없는 우리 남편을 살려달라’고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고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석방 투쟁을 벌였대요. 경찰서장이고 교도소장이고 가리지 않았대요. 갓난아이를 업고 끝까지 싸워 요구를 관철하곤 했지요. 험한 길로 이끌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그는 70년대 후반 열관리 기사 자격증을 따 기술학원 강사를 지냈다. 학생운동의 흐름에서 벗어난 생활이었다. 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오면서 다시 반전이 왔다. 제적 15년 만에 어렵사리 학교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복학생에서 사형수로 급변하고 말았다. 내란수괴로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5·18 관련자 중에서 가장 오래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네차례 교도소에 갔는데 5·18 때 안양교도소가 가장 힘들었어요.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징역을 제대로 살지 못했죠. 알게 모르게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있었나 봐요. 책을 읽지도 못하고, 몸 곳곳이 망가지는 등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어요.”
그는 82년 12월 풀려나 40대를 질풍노도처럼 달렸다. 희생된 영령한테 속죄하는 심정으로 진상 규명과 학살자 처벌에 앞장섰다. 80년대 내내 안기부의 치졸한 망월동 묘역 없애기 공작에 맞섰고, 5월 유가족과 부상자를 중심으로 5월 단체를 꾸렸다. 88년에는 국회 광주청문회에 나가 신군부의 고문 수사를 폭로하고, 5월 정신의 계승을 다짐하는 5·18 전야제를 추진했다. 이어 학살자를 검찰에 고발하고, 불기소 처분에 맞서 수사 결과를 검증하는 등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광주구속자협의회 사무국장, 5·18민중항쟁연합 상임의장, 5·18기념사업추진위원회 사무국장, 민주주의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 공동의장 등으로 거리를 누볐다.
2010년 5·18 30돌 기념행사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5월 강연 등 시민이 동참하는 행사들을 추진했다.
광주 시민운동의 중심이었던 그는 86년 5월3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결의에 따라 인천시위에 참여했다. 이후 열달 동안 수배를 피해 숨어다니다 붙잡혀 집시법 위반 등으로 세번째 옥고를 치렀다. 88년에는 조선대 교지 편집장 이철규씨의 사인 규명 투쟁에 뛰어들었고, 이듬해 체포돼 네번째로 감옥에 들어가야 했다.
“80년 태어난 둘째가 초등학교에 갔을 때 수배가 됐어요. 전국 곳곳에 수배전단이 엄청 붙었죠. 둘째가 친구들과 걷다가 골목에 붙은 아빠 얼굴을 얼른 몸으로 가렸대요. 친구들이 다 지나가자 쭈뼛쭈뼛 뒤따라가는 장면을 아내가 봤어요. 이를 전해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바늘로 찔린 듯 찌르르 하더라고요.”
40~50대를 5월운동으로 보낸 그는 99년 9월 우여곡절 끝에 광주시 남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시민후보로 추대됐으나 이를 눈치챈 국민회의 쪽에서 먼저 공천자로 발표하는 바람에 뜬금없이 정당 후보가 됐다. 구청장 시절은 힘이 들었다. 공무원들은 ‘주민’보다 ‘법령’을 더 중시했고, 이를 좌시할 수는 없었다.
“아파트가 들어섰는데 몇년째 준공이 안 나는 거예요. 알아보니 실제 도로와 계획 도로가 달랐어요. 주민이 이미 입주했으니 건물을 부술 수도 없고 도로 계획을 바꿔 불편을 해소하자고 했어요. 뒷일을 감당할 수 없다며 요지부동이어서 애를 먹었죠.”
지방자치에서 구청장의 한계를 절감한 그는 2002년 5월 무소속으로 광주시장에 출마했다. 득표율 27%로 선전했지만 민주당의 높은 벽을 넘지는 못했다.
오월어머니집 안내판에 붙은 5·18 가족들 사진.
“민주도시 광주에 걸맞은 도전을 해보고 싶었어요. 승패를 떠나 ‘정의’라고 믿는 쪽으로 달려왔죠. 광주를 ‘80년 5월’의 공동체 정신을 회복한 도시로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낙선 뒤에도 그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5월운동의 한축을 지켰다. 2004년 5·18 수사기록 검증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불기소 처분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따졌다. 2010년 5·18 30돌 기념행사위원장을 지내며 시민강좌를 뚝심 있게 밀어붙이고, 북한 문화예술단을 초청하는 사업도 추진했다. 그사이 3년 동안 안산도시개발 사장을 지내며 외부자의 시선으로 광주를 바라보기도 했다. 70대에 이른 이후에는 전남 담양 남면(현 가사문학면)에 작은 농원을 가꾸며 지낸다. 뇌졸중 등으로 몇차례 고비를 겪고 회복한 뒤로는 바둑을 두거나 스트레칭을 하는 등 부담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1988년 11월 국회 광주청문회 증언 모습.
“손주들이 할아버지가 사형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눈치예요. 조심스러워서 드러내놓고 묻거나 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부끄러워하지는 않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손주들이 5월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날이 오겠지요.”
그는 40돌을 맞은 소감을 묻자 먼발치에 있는 무등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광주엔 무등산이 있잖아요. 무등은 등급이 없다, 차별이 없다 그런 뜻이지요. 무등이란 이름처럼 광주가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따돌리지 않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이 든 운동가가 간직한 마지막 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