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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아우토5000과 광주형 일자리 / 정대하

등록 2020-04-07 18:17수정 2020-04-08 14:07

정대하

전국부 선임기자

“5000명의 실업자를 월급 5000마르크의 정규직으로 채용한다면 노조가 새로운 단체협약을 맺을 용의가 있는가?”

독일 완성차 업체 폴크스바겐은 1999년 말 노조에 획기적인 제안을 한다. 지역 실업률이 17%대를 오르내릴 때였다. 임금이 더 낮은 동유럽을 염두에 뒀던 회사는 혁신공장을 만든다면 독일 안에 신규 투자를 할 생각이었다. 5000마르크는 폴크스바겐 노동자보다 20% 적은 수준이었지만, 금속노조도 ‘5000×5000’ 프로젝트를 환영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2년 볼프스부르크에 아우토5000이라는 유한회사가 설립됐다.

아우토5000의 주개념은 혁신공장이었다. 국외보다 임금은 더 높지만 노사 합의로 유연성을 확보해 경쟁력을 높였다. 일감이 많을 땐 많이 일하고 적을 땐 적게 일하며 가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조절했다. 물론 노동시간 총량은 엄격히 지킨다. 그들은 이러한 노동의 유연화를 가리켜 ‘숨쉬는 공장’으로 표현했다. 폴크스바겐의 아우토5000 실험은 2009년 4200명 전원이 본사 정규직으로 통합되면서 성공리에 끝났다.

광주형 일자리가 추구하는 가치도 혁신공장이다. 광주형 일자리는 전체 노동자 평균 초임이 주 44시간 기준 연 3500만원 선으로 설계됐다. 생산직은 3000만원 정도로 동종업계 노동자 초임의 절반 수준이다. 광주시와 지역 노동계는 주거·보육·의료 등을 지원해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높여주자는 아이디어를 찾아냈다. 2014년 시작된 혁신공장의 꿈은 지난해 1월 광주시와 현대차의 투자협약이 이뤄지면서 기대감을 키웠다.

한국노총 광주지역본부가 지난 2일 광주광역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광주형 일자리 참여 중단 선언을 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한국노총 광주지역본부가 지난 2일 광주광역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광주형 일자리 참여 중단 선언을 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한국노총 광주본부는 지난 2일 광주형 일자리 불참을 선언했다. 민주노총의 호된 비판을 받으면서도 혁신실험에 참여했던 한국노총이 돌아선 것은 광주시의 태도 때문이다. 조짐은 지난해 8월 ㈜광주글로벌모터스 설립께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신설법인 공장을 혁신적으로 짓는 것부터 머리를 맞대길 기대했던 노동계는 광주시가 자신들을 진지한 협력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동계가 빠진 광주형 일자리는 ‘광주 일자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내년 하반기에 공장이 완공되면 현대차의 경형 에스유브이(SUV) 신규 차종을 위탁 생산할 수 있다. 당연히 정규직 1000명의 일자리도 생긴다. 하지만 신설법인 공장이 ‘현대차 저임금 하청공장’으로 전락할 우려도 여전하다. 이용섭 광주시장은 지난 2일 노동계를 설득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노총 광주본부가 기자회견 때 앞세운 펼침막의 구호는 “이용섭 시장 각성하라!”다. 2018년 7월 이 시장 취임 이후 느꼈던 실망을 압축한 표현이다.

‘광주 일자리’는 현대자동차엔 꽃놀이패가 될 수 있다. 현대차는 광주글로벌모터스 자본금 2300억원 중 437억원(19%)을 투자해 2대 주주다. 총사업비 5754억원 중 자본금 2300억원을 제외한 3454억원을 금융권에서 차입하는 주체는 신설법인이다. 현대차는 신설법인의 경영 성과의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또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현대엔지니어링은 광주글로벌모터스 공장 건설을 수주받았다. 현대차로선 차입금으로 공장을 세우고 정부의 일자리 정책에 동참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등 손해 볼 일이 없다.

‘광주형 일자리’의 취지가 무색해지면서 신설법인 공장의 노사대립을 중재할 사회적 대화 기구마저 가동하기 힘든 상황이다. 당장 노사교섭 조건의 큰 틀을 정한 노사상생발전 협정서부터 무효가 됐다. 이 때문에 광주형 일자리 취지를 원래대로 복원하려면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아우토5000 설립 당시 노사갈등이 깊어져 협상이 결렬됐을 때 물길을 돌린 것은 사회적 압력이었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슈뢰더 총리가 노사 양쪽을 설득해 극적 합의를 이끌었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공약의 하나인 광주형 일자리가 좌초될 위기다. 시민과 투자자들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이제 정부가 나서야 한다.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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