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진 광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사진 광주교대 제공
“경제구조 속에서 차지하는 전라도의 위상과 저항정신, 특산품, 장시, 항해술과 어업 등에 대해 살폈죠.”
오랜 세월 전라도를 연구해 <전라도의 탄생 2>(선인)라는 책으로 묶은 김덕진(60) 광주교대 교수(사회과교육과)는 6일 “전라도 통사 편찬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책은 ‘생업의 현장’이라는 부제처럼 “생산활동의 영역에 따라 크게 농업·세금, 광공업, 상업, 해운업·어업으로 나누어 정리한 기록”이다. <전라도의 탄생 1>에 이어 <조선왕조실록>과 각종 문집 등 기록을 바탕삼아 전라도의 역사를 촘촘히 기록하고 있다.
지방 소읍 장시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15세기 때 전라도에서 등장했다. <조선왕조실록>(1472년 7월27일·성종3)엔 광주·나주·함평·무안 사람들이 길거리에 다달이 두차례 장문을 열었다. 1470년 대흉년이 들자 전라도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시포를 열었던 것이다. 일부 중앙 관료들이 반대했지만, 결국 정부는 허용했다. 김 교수는 “장시는 민중들이 대자보를 걸거나 집회를 열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덕진 교수가 쓴 <전라도의 탄생 2> 표지.
저자는 전라도 장인들의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도 꼼꼼히 정리했다. 전라좌수영(전남 여수) 장인들은 16세기 선조 땐 거북선을 제조했다. 전라도 사람들은 원양 항해에 뛰어나 멀리 울릉도와 독도까지 갔다. 1882년 울릉도 주민 140명 중 115명이 전라도 사람들이었다는 기록(이규원 <검찰일기>)이 나올 정도다. 김 교수는 “독도는 전라도 방언인 ‘돌섬’이나 ‘독섬’에서 유래했다. 한자 표기어인 ‘석도’를 음을 빌어서 적으면 독도가 된다”고 말했다.
전라도 대표적인 음식인 삭힌 홍어 이야기도 흥미롭다. 홍어는 흑산도 인근에서많이 잡혔다. 고려 말에 왜구들이 흑산도(영산도)를 공격하자, 그 사람들이 나주 남포로 나와 터를 잡아 영산포로 불렸다. 김 교수는 “목포를 거쳐 영산포까지 오는 도중 홍어가 삭혀졌다. 이 삭힌 홍어가 다시 내륙으로 보급돼 전라도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고 했다.
김 양식에 처음 성공한 곳은 전남 광양이다. <조선왕조실록> 등 정부 공식 문서에 죄다 해의(海衣)로 기록됐던 김은 본래 자연산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초 전라도 광양 사람 김여익이 나무토막에 해의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양식에 성공했다. 김 교수는 “해의를 전라도 일부에선 ‘해우’라고 했고, 최초 양식자인 김여익의 성을 따 김이라고 적었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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