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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택시운전사>의 독일기자가 찍은 19살 시민군…“내가 북한군이라니”

등록 2020-04-06 13:32수정 2020-04-06 16:25

[5·18 40주년 기획] 오월, 그날 그사람들
⑦북한군으로 조작된 시민군 곽희성씨
공수부대 입대 대기 중 ‘5월 학살’ 목격
손수레 실린 주검 본 뒤 시민군에 가세
5월23일 YMCA서 힌츠페터 영상 촬영
“도청서 들려온 ‘애국가’ 부르며 울컥”
항쟁중 거리 헤매던 어머니 보고 고민
진압작전 전날 빠져나온 것에 ‘부채감’
택시노동자로 집시법 구속 등 노조활동
지만원 지칭 ‘광수 184번’…진실규명운동

1980년 5월 광주와이엠시에이(YMCA) 옥상에서 19살 시민군 곽희성씨가 애국가를 따라 부르다가 환하게 웃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월 광주와이엠시에이(YMCA) 옥상에서 19살 시민군 곽희성씨가 애국가를 따라 부르다가 환하게 웃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화면 속에서 거뭇한 수염의 한 청년이 철모를 쓴 채 애국가를 따라 부른다. 청년의 눈길은 옛 전남도청 앞 분수대 광장 집회로 향한다. 1980년 5·18 당시 19살의 나이로 시민군이 된 곽희성(59)씨는 광주와이엠시에이(YMCA) 옥상에서 총을 들고 서 있었다. 독일 공영방송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1937~2016)가 촬영한 당시 영상 속에 젊은 날 곽씨의 모습이 나온다. 힌츠페터 기자는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제 주인공이다.

힌츠페터를 만난 것은 80년 5월23일께였다. 통역 1명과 동행한 힌츠페터는 광주와이엠시에이 옥상으로 올라와 전남도청 앞 집회 장면을 촬영하게 해달라고 했다. 곽씨는 처음엔 거절했다고 한다. “(항쟁 지휘부에서) 훗날 살아남았을 때 큰일난다고 사진 촬영에 응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힌츠페터가 시민군들에게 양담배 한갑씩을 건넸다. 담배가 궁했던 때, 젊은 시민군들은 술렁였다. 그때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민들의 애국가 제창이 시작됐다. “그땐 애국가만 나오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거여. 상무관에 시신들도 있었고. 그런데 집회 장면을 찍던 외국인 기자가 애국가를 부르고 있던 나한테 갑자기 카메라를 돌려부렀어요. 나는 찍힌지도 몰랐제.”

1980년 5월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존 인물 고 위르겐 힌츠페터가 찍은 영상 속의 시민군 곽희성씨가 지난달 23일 오후 금남로에 섰다. 정대하 기자
1980년 5월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존 인물 고 위르겐 힌츠페터가 찍은 영상 속의 시민군 곽희성씨가 지난달 23일 오후 금남로에 섰다. 정대하 기자
곽씨가 5월의 격랑 속으로 빠져든 것은 ‘탱크 굉음’ 때문이었다. 그해 1월 공수특전여단에 지원했다가 가족의 반대로 입대하지 못했던 그는 입대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놀고 있음서 5·18이 터진지도 몰랐어요. 친구가 연 화정동 샷시(새시) 가게에 모여 있었지요.” 곽씨는 5월19일 아침 후배 양동남씨와 거리로 나섰다가 줄줄이 이어진 탱크 행렬을 봤다. “‘뭔 일 났는갑다’ 했지요. 걸어서, 걸어서 올라강께 국군통합병원에 탱크들이 정차돼 있드만요. 차들은 안 다니고.” 그날 전두환 신군부가 시민들을 학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탱크와 병력을 배치했던 날이다.

곽씨는 옛 전남도청 쪽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탔다. 동행했던 후배 양동남씨는 그날을 5월20일로 기억한다. “농성동에 지하차도가 없었는데, 그 부근에 목재소가 있었어요. 그 앞에 있으니까, 시민들이 몰던 버스에서 ‘도청으로 갈 사람은 타라’고 하더라구요. 무조건 탔지요. 시내 한국은행 사거리에서 정차했어요.” 곽씨는 충장로 들머리에서 처음으로 주검을 목격했다. “리어카(손수레) 우에가(위에) 시신 한구가 놓여 있었어요. 태극기가 덮여 있는데 얼굴이 보이고요. 요것을 보고 무서운 게 아니라 뭐가 끓어오르더라구요. 화도 나고. 입에서 욕도 나오고.”

1980년 5·18항쟁 때 전남대병원 옥상에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맨 왼쪽)가 인터뷰 취재를 하는 동안 폴 코트라이트(오른쪽 둘째) 등 평화봉사단원들이 돕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18항쟁 때 전남대병원 옥상에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맨 왼쪽)가 인터뷰 취재를 하는 동안 폴 코트라이트(오른쪽 둘째) 등 평화봉사단원들이 돕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공수부대 군인들은 최루탄을 쏘며 시민들을 쫓았다. 후배 양씨와는 도망치는 길에 흩어졌다. 수기동 한 가게로 도망쳐 평상 밑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평상 밑의 거친 나뭇결에 얼굴이 긁혔지만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군인들이 달려와 노부부에게 행방을 캐물었다. 다행히 노부부가 “아무도 없다”고 잡아떼 연행을 면했다. 그 집을 나왔다가 결국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내가 머리도 길고 그렁게 넝마주이로 봤능가 곤봉으로 몇대 패더니 윙크 비슷하게 하며 도망가라는 표시를 하더라구요.” 다행이었다.

1980년 5월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존 인물 고 위르겐 힌츠페터가 찍은 영상 속의 시민군 곽희성씨.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월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존 인물 고 위르겐 힌츠페터가 찍은 영상 속의 시민군 곽희성씨. 5·18기념재단 제공
5월21일 옛 전남도청 앞 계엄군이 집단발포를 한 뒤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시작했다. 곽씨는 광주 인근 화순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초등학교 때 화순탄광에서 일하던 아버지에게 도시락을 가져다드릴 때 보았던 다이너마이트가 생각났다. 68년 폭파 사고 때 아버지는 화순탄광에서 오른쪽 손목과 시각·청각을 잃었다. 시민들과 화순으로 향하던 곽씨는 광주~화순 경계인 너릿재 검문소에서 경찰관들이 버린 총을 집어 들었다. 화순탄광으로 가던 길을 돌려 한 파출소에서 실탄을 챙겨 광주로 돌아왔다.

외곽으로 퇴각한 계엄군에 의해 광주는 봉쇄됐다. 곽씨는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에 가서 군용트럭 등을 몰고 나왔다. “군용트럭은 열쇠가 없어요. 제끼는(젖히는) 레바로 돼 있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차를 끌고 나왔어요. 고놈을 타고 다녔지요. 운전한 사람이 농성동 원목 바리케이드 있는 곳으로 가더라구요.” 차에 탔던 10여명은 잠시 차에서 내려 음료수와 김밥으로 허기를 채웠다. 그때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교련복을 입은 한 10대가 트럭으로 올라가더라구요. ‘올라가지 마!’라고 소리쳤는데 총에 맞고 쓰러졌어요.”

1980년 5·18 당시 신군부의 명령을 받고 광주에 출동한 공수부대와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시민들을 진압하고 있다.(왼쪽) 이에 시민들이 차량 행진을 하며 공수부대의 학살에 맞서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18 당시 신군부의 명령을 받고 광주에 출동한 공수부대와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시민들을 진압하고 있다.(왼쪽) 이에 시민들이 차량 행진을 하며 공수부대의 학살에 맞서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교련복 소년을 조수석에 태우고 기독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처음 해보는 운전이었다. “엉덩이가 축축해요. 몸을 타고 피가 엉덩이로 흐르더라구요. 수건으로 덮었죠. 눈 밑에 총을 맞아 머리 뒤로 구멍이 뽕 뚫린 거였어요.” 곽씨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응급실에서 나온 의료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병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길래 그 아이 손을 붙잡고 가슴을 한 두어번 토닥토닥해줬어요.”

다시 도청으로 갔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와 계엄사 쪽이 협상을 진행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계엄군은 무기 반납을 요구했고, 젊은이들은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광주 재진압 작전)은 5월27일로 예정돼 있었다. 곽씨는 시민군에 편입돼 전일빌딩부터 한국은행 사거리까지 순찰을 돌았다. 도망치다 헤어진 후배 양동남의 근황도 그때 알게 됐다. 시민군으로 전남도청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것이다.

5·18 시민군 곽희성씨는 1982년 육군에 입대해 포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곽희성씨 제공
5·18 시민군 곽희성씨는 1982년 육군에 입대해 포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곽희성씨 제공
그는 최후 항쟁 직전, 죽음을 피해 광주를 떠났다. 총기 회수에 나섰던 그는 월산동 로터리 쪽에서 ‘월남치마’를 입고 멍한 눈으로 거리를 헤매는 한 여성을 목격했다. 어머니였다. “내가 죽은 줄 알고 영안실만 계속 찾아다니셨다는 것을 훗날 들었어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시민군 부대장한테 고민을 털어놓았다. 부대장은 “언제든지 총을 반납하고 가라”고 했다. 계엄군의 눈을 피해 골목길과 풀숲을 택해 걸어 36시간 만에 집에 도착했지만 혼자 살아남았다는 부채감에 부끄러웠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가 난 뒤 전남 진도 팽목항을 찾은 곽희성씨 가족. 곽희성씨 제공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가 난 뒤 전남 진도 팽목항을 찾은 곽희성씨 가족. 곽희성씨 제공
곽희성씨는 아들 둘을 낳을 때까지 아내에게 시민군이었다는 사실을 숨겼다.  곽희성씨 제공
곽희성씨는 아들 둘을 낳을 때까지 아내에게 시민군이었다는 사실을 숨겼다. 곽희성씨 제공
82년 2월 군에 입대해 만기 제대했다. 그즈음 비디오 가게를 운영하는 친구가 몰래 틀어준 5·18 민주화운동 비디오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담배를 건넸던 외국인 기자(힌츠페터)가 찍었던 5·18 영상이 돌던 때였다. 애국가를 부르는 곽씨의 모습을 본 친구는 “잡혀갈지 모르니까 사람들이 많은 곳엔 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86년부터 택시운전사가 됐던 그는 항상 머리를 짧게 깎고 양복바지와 조끼 차림에 넥타이를 맸다. 단정한 인상을 줘야 5·18과 무관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들 둘을 낳을 때까지도 아내에게 5·18 시민군이었다는 사실을 숨겼다.

5·18 학살을 영상에 담아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위르겐 힌츠페터가 2015년 송건호 언론상을 받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5·18 학살을 영상에 담아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위르겐 힌츠페터가 2015년 송건호 언론상을 받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5·18의 기억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불의를 눈감지 못하는 기질은 숨길 수 없었다. 89년 다니던 택시회사에서 어용노조를 몰아내기 위해 40여일 동안 파업을 벌이다 집시법·폭력 혐의로 구속됐다. 우여곡절 끝에 복직해 노조위원장이 됐다. 6년4개월여 동안 노조를 이끌었다. 1992년께에는 5·18 광주항쟁 민주기사 동지회에 가입해 다른 회원들과 비인가 복지시설을 찾아 목욕을 시켜주는 등 봉사활동도 했다. 임대아파트에서 살던 그는 그곳에서 5·18 때 헤어졌던 후배 양동남씨를 극적으로 다시 만났다. 양씨는 내란실행죄로 고초를 겪은 뒤 출소했다고 말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지난 2월13일 수구논객 지만원씨가 서울중앙지법에 출두하면서 검색대를 통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월13일 수구논객 지만원씨가 서울중앙지법에 출두하면서 검색대를 통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개인택시 기사로 생계를 꾸려온 곽씨는 4년 전 광주트라우마센터의 사진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곽씨 등 7명의 5·18 유공자는 2016년 5월16~23일 서울 시민청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국립5·18민주묘지 741기의 묘지를 하나씩 모두 찍어 하나의 이미지로 작품화했다. 그 사진을 찍으며 처음으로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갔다. “교련복 그 소년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찾고 싶더만요. 일일이 두번씩 절허구 묵념까지 하고 나서 묘지마다 딱 한 카트씩만 찍었어요. 그게 쌓이니까 미안한 감도 조금 없어지고.”

곽희성씨 등 5·18 유공자 7명이 2016년 5월16~23일 서울 시민청 갤러리에서 연 사진 전시회. 곽씨는 741기의 묘지를 찍은 사진을 하나의 이미지로 묶어 작품화했다. 광주트라우마센터 제공
곽희성씨 등 5·18 유공자 7명이 2016년 5월16~23일 서울 시민청 갤러리에서 연 사진 전시회. 곽씨는 741기의 묘지를 찍은 사진을 하나의 이미지로 묶어 작품화했다. 광주트라우마센터 제공
곽씨는 5·18 진실규명 투쟁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5·18을 왜곡하는 수구논객 지만원은 그를 황해남도 인민위원장 권춘학 ‘184번 광수(광주로 투입된 북한특수군)’로 낙인찍었다. 곽씨 등 4명은 2015년 10월 지씨를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고소했다. 이후 추가 고소가 이뤄져 5건(15명)과 <택시운전사>의 실존 인물인 고 김사복씨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고소 사건 등이 모두 병합돼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지씨는 지난 2월13일 징역 2년의 실형과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았을 뿐 법정 구속은 모면했다.

“재판정에 갔다가 갑자기 (지만원에게) 달려들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구요. 판사가 있든 검사가 있든 겁이 안 나. 겨우 자제했제. 노력을 엄청 했지. 내가 소란 피우면 또 5·18에 대해 비난이 일고 난리가 나니까요. 그런데 세상에 후배 양동남이 북한의 최룡해라니 양동남이 홍길동이요? 나도 군대까지 다 갔다 왔는데, 광수라니요?”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1980년 5월 광주와이엠시에이(YMCA) 옥상에서 총을 들고 경계를 서던 19살 시민군 곽희성씨가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월 광주와이엠시에이(YMCA) 옥상에서 총을 들고 경계를 서던 19살 시민군 곽희성씨가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5·18기념재단 제공
영화 <택시운전사> 주인공 송강호. <한겨레> 자료사진
영화 <택시운전사> 주인공 송강호. <한겨레> 자료사진
한국에서 온 조문단이 유족에게 전한 광주명예시민증과 감사패 옆에 놓인 위르겐 힌츠페터의 영정사진. 생전 한국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며 찍은 이 사진을 고인이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국에서 온 조문단이 유족에게 전한 광주명예시민증과 감사패 옆에 놓인 위르겐 힌츠페터의 영정사진. 생전 한국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며 찍은 이 사진을 고인이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곽희성씨 등 5·18유공자 7명이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진행한 사진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광주트라우마센터 제공
곽희성씨 등 5·18유공자 7명이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진행한 사진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광주트라우마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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