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병원 중환자실에 근무했던 김명련(붉은 원) 간호사가 환자를 돌보고 있다. 전남대병원 제공
“누군지를 모르는데 환자는 구분해야 하니까 응급실 전공의들이 대충 이름을 붙였어요. 환자가 파란 추리닝 하의를 입고 있으면 ‘
파추하’, 검고 파란 상의를 입고 있으면 ‘검파상’, 학동에서 발견된 남성이면 ‘학동남’으로 부르는 식이죠. 부상자들이 중환자실로 올 때는 이미 환자복을 입고 있었지만 우리는 계속 그렇게 불렀어요.”
5·18 민주화운동 때 전남대학교병원 중환자실에서 근무했던 간호사 김명련(64)씨는 40년 전 돌봤던 환자들의 별칭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전남대병원 의료진은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다친 시민들이 밀려들자 미처 신원을 확인할 틈도 없이 응급처치부터 하기 바빴다.
1980년 2월 전남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3월 전남대병원에 취직한 김씨는 세상 물정 모르는 평범한 아가씨였다. 5남매의 맏이로서 빨리 돈을 벌어 집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내과에서 간호사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김명련 간호사가 5·18 당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5·18이 일어나기 이틀 전쯤일까 광주 가톨릭센터(현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근처 다방에서 친구를 만났어요. 제일극장(현 롯데시네마 충장로점)으로 영화를 보러 가려고 길을 건너는데 젊은 사람들이 경찰에 무더기로 붙잡혀서 트럭에 타고 있었어요. 경찰이 ‘이 새끼들 빨리 타’라고 말한 걸 듣고 무엇인가 죄를 지은 사람들인지 알았죠.”
1980년 5월18일 0시 밤근무를 서고 있을 때도 각진 군복을 입은 군인 2명이 중환자실로 들어올 때도 그저 보호자라고 생각했다. 김씨는 “여기(중환자실)는 보호자도 면회가 안 되는 곳이다. 들어오면 안 된다”고 말하며 군인들을 막아섰다. 군인들은 매서운 눈빛으로 내부를 살펴본 뒤 아무 말 없이 떠났다. 그날 아침 간호부에서 그 군인들이 계엄군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덜컥 겁이 났다.
김씨가 있던 3층 중환자실은 간호사 10명이 병상 10개의 환자들을 돌보던 곳이었다. 환자 일부는 의식이 없고, 일부는 위중한 상태라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5월18일이 되자 환자는 갑절로 늘어났다. 병상이 부족해 환자 이송용 병상을 사이사이에 배치했다. 1층 응급실에서 올라온 환자 대부분은 의식이 없었다. 머리에 부상을 당한 ‘
청추하’ 환자도 곧 수술에 들어갈 수 있도록 머리카락을 다 밀고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환자들이 올라오면 곧 기관지 절개술을 하고 인공호흡부터 했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올 정도면 살아날 가망이 있다는 의미였죠. 한편으로는 돌아가신 분들도 있어 무력감을 느꼈어요.”
5·18 민주화운동 때 전남대병원 의료진이 부상을 당한 시민에게 응급처치를 하고 있다. 전남대병원 제공
병원 내부는 난리 통이었다. 약제와 물품이 떨어졌다. 기숙사가 폐쇄돼 잠은 복도에 상자를 깔고 자야 했다. 5월21일 밖에서 총소리가 날 때는 선배 간호사들과 알루미늄 재질로 된 차트판을 창문에 붙여 총알이 못 들어오게 했다.
병원 생활은 견딜 만했다. 힘든 것은 부실한 식사였다. 중환자실 막내였던 김씨가 직원 식당에서 냄비에 밥을 담아 오면 근무자를 뺀 간호사들이 함께 떠먹었다. 반찬은 깻잎장아찌뿐이었다. 이때 깻잎장아찌에 질린 김씨는 지금은 입에 대지도 않는다.
열악한 환경에도 선배 의료진은 의연하게 대처했다. 똑같이 힘들지만 ‘잘하고 있다’ ‘고생한다’며 후배들을 먼저 챙겼다. 김씨는 당시 외국인 기자가 방송 카메라를 들고 왔을 때 의사들이 영어로 능숙하게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고 멋있다고 느꼈다.
선배 의료진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적도 있었다. 5월20일쯤 가족이 걱정된 김씨가 전남대 후문에 있던 집으로 가려고 하자 선배들은 간호복을 챙겨 가라고 했다. 병원과 집 중간 지점인 옛 광주시청 앞에서 계엄군한테 붙들렸지만 간호복을 보여주자 풀어준 일도 있었다.
김영진 전 전남대병원 병원장이 5·18 당시 첫 총상 환자를 치료했던 경험을 말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물론 정신을 다잡는 것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날들이었다. 응급치료에 인력이 집중되면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숨지는 안타까운 환자도 속출했다. “췌장 질환을 앓고 있던 50대 남성분이었어요. 5·18 이전부터 중환자실에 있었지만 의료진이 부족해 치료를 제대로 못 받았어요. 건강이 악화돼 임종 순간이 다가왔지만 병원 장례식장조차 사용할 수 없었죠. 환자 가족들은 화도 내지 않고 집으로 모셔 가겠다고 했어요. 부인이 손수레에 환자를 태우고 아들 둘과 함께 데리고 가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해요.” 뇌출혈을 앓았던 환자도 잊을 수 없다는 김씨는 “이분들도 언젠가 5·18 피해자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5·18은 개인적으로 성숙의 계기였어요. 간호사 생활을 하며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5·18을 생각하면 아무렇지 않았어요. 지금 코로나19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대구·경북 간호사들이 남 같지 않습니다.”
김영진(66) 전 전남대병원장에게도 80년 5월 그날은 ‘화인’처럼 남아 있다. 당시 김 전 원장은 외과 전공의 1년차인 26살 청년이었다. 비상계엄이 확대돼 의대 교수들의 출근길이 막히자 자신과 같은 외과 전공의 15명이 응급실 철야근무를 서며 환자들을 돌봤다.
5·18 첫 총상 환자였던 김영찬(당시 조대부고 3년)
씨를 만난 것이 그때였다. “5월19일에 김영찬이가 실려 왔어요. 계림동 쪽에서 계엄군 장갑차에 올라가려다 안에서 쏜 총에 맞았다고 하더라고요. 총알이 대장과 소장을 뚫고 나가 장기를 빼놓고 수술을 하고 다시 집어넣었어요. 최근 다시 만났는데 건강하게 잘 살고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18∼19일에는 곤봉에 맞아서 다친 환자가 많았다. 20일은 잠잠해 한시름 놓았는데 21일 오후부터 총상 환자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머리·흉부·복부·척추·사지 관통상 등 모든 형태의 총상 환자가 계속 밀려왔다. 좁은 응급실은 곧 아수라장이 됐다.
1980년 5월22일 계엄군의 진압에 부상을 당한 광주시민이 전남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전남대병원 제공
“진짜 전쟁 통이라는 말이 딱 맞았습니다. 어떤 환자는 머리에 총을 맞아 뇌수가 보이고, 곳곳에서 의료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수술하려면 원래는 마취과에 연락해야 하지만 그럴 경황이 아니었어요. 우리가 환자들을 수술실로 끌고 올라가 곧바로 수술했어요. 전남대병원 역사상 그런 수술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입니다.”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철수한 5월21일 오후부터는 환자가 줄었다. 총상 환자는 모두 국군통합병원(당시 화정동)으로 갔다고 했다. 남은 환자를 돌보며 27일을 맞았는데 바깥에서 거리방송 소리가 들렸다. 계엄군이 다시 온다는 것이었다.
“다른 전공의들과 11층 숙소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총알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천장에 박혔어요. 조금 뒤 군인이 올라와 시민군을 찾는다며 침대 밑이랑 화장실 등을 샅샅이 뒤지더군요. 또 병원에 최루탄을 던져 1층부터 11층까지 최루가스가 가득 차 고통스러웠습니다.”
1980년 5월15일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학생들이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전남대 제공
김 전 원장은 군인들이 모두 물러간 뒤 병원에서 가까운 옛 전남도청 앞 상무관(민간인 주검 임시 안치 장소)에 나가봤다. 병원에서 봤던 환자 등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생각에 미안함과 비참함을 느꼈다. “냉정한 이야기지만 지금 생각하면 위급한 환자가 아닌, 살릴 수 있는 환자부터 치료했어야 했어요. 간 등 주요 장기가 손상된 환자들은 살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해 순위를 뒤로 미뤘어야 했는데. 많은 환자를 살리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목숨은 건졌지만 평생 장애로 신음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5월22일 부모와 담양으로 피신하다 총격을 당해 평생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던 김아무개(당시 5살)
양, 23일 계엄군의 군홧발에 머리가 찍혀 한쪽 눈을 잃은 이지현(당시 30살, 5·18부상자동지회 초대 회장)씨는 의료진에게
부채의식으로 남았다.
의료진이 한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분투할 때, 계엄군들은 병원을 향해서 총을 난사했다. 21일 오후 시 외곽으로 철수할 때와 27일 재진입할 때였다. 노성만 전 전남대병원장이 전남대 5·18기념관에 기증한 흰색 가운에는 총알이 뚫고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다.
노성만 전 전남대병원장이 전남대 5·18기념관에 기증한 5·18 당시 총알이 뚫고 지나간 가운. 연합뉴스
5·18 때 전남대병원은 흡사 야전병원이었다. 당시 진료기록지, 수술대장, 마취장부를 보면 모두 223명의 사상자가 병원을 거쳤다고 한다. 이 중 20대가 105명으로 가장 많았고 10대가 49명, 30대가 28명 차례였다. 총상 환자는 91명, 구타로 인한 환자는 58명, 자상·폭약·최루탄 등에 의한 환자는 50명이었다. 전남대병원 의료진과 광주시민들은 한마음으로 절망을 이겨냈다.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헌혈 행렬이 길게 늘어서 오히려 남을 정도였고 산소통 등 부족한 치료 물품은 금세 시민군들이 구해왔다. 의사들은 환자를 이송하는 시민들이 해를 입을까 봐 자신의 가운을 입혀줬고 피신한 시민군을 숨겨주기도 했다.
현재 전남대병원은 코로나19 확산 방지 최일선에 서 있다. 감염병 전문병원으로 지정된 빛고을전남대병원에서는 대구 환자들을 치료하며 공동체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5·18이 일어난 지 40년이 흐르며 전남대병원은 규모가 커지고 외형도 바뀌었다. 2004년에는 화순전남대병원이 문을 열었고 2012년 본관 리모델링, 2014년 빛고을전남대병원 개원, 2017년 전남대어린이병원 개원 등 지역민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5·18을 경험한 당시 전공의들은 광주시민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김영진 전 원장은 “5·18 당시 많은 환자를 살리지 못한 미안함과 아쉬움이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의 진료를 제공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5·18 당시 전남대병원 의료진이 작성한 병상기록부.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