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그날 그 사람들 5·18항쟁 17살 고교생 시민군 이덕준 친구 죽음 소식 듣고 옛 도청으로 합류 강제징집-노동운동-구속·수감-환경미화원 “5·18고교생 항쟁사 역사 기록 남기고파”
1980년 5월27일 새벽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서 실탄 소지자로 붙잡힌 이덕준(17·오른쪽 둘째)군이 고개를 숙인 채 군인들에게 끌려가고 있다. 천주교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광주민중항쟁 기록사진집>
깜박 졸다가 총소리에 잠이 깼다. 군인들의 진압 작전이 시작됐다. 누군가 “사격하라”고 소리쳤다. 카빈을 1층 창가에 댄 채 딱 두번 방아쇠를 당겼다. 후방에서 총소리가 들려 부엌으로 피신했다. 대여섯명의 여성들이 쟁반 들고 총알을 막고 있었다. 여대생 한명이 총에 맞았다.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총 쏘지 마…. 살려 주세요. 사람이 총에 맞았어요.” 이덕준이 외쳤다. 그는 1980년 5월27일 새벽 옛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서 부상자를 부축하고 나오다가 체포됐다.
1980년 5·18 당시 군 영창에 수감됐던 이덕준(오른쪽 둘째)씨 등 고교생 시민군 출신 인사들은 지난해 10월 첫 모임을 열고 5월 고교생 항쟁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김향득 사진가 제공
“군인들에게 총을 쏠 생각보다는 총을 던지고 얼른 총 맞은 사람부터 살려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어요.”
17살 고교생 시민군이었던 이덕준(57·경기도 부천시)씨는 공수부대 장교가 ‘상황종료’라고 무전을 날렸던 시각을 새벽 5시30분께로 기억한다.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에서 300m 정도 떨어져 있던 시민군의 거점인 옛 전남도청도 이미 함락된 뒤였다. 이날 와이더블유시에이에선 3명이 사살되고 27명이 체포됐다. 같이 체포된 친구 둘은 모두 대동고 동창이었다. 당시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엔 11공수여단 군인들이 투입됐다.
5·18 때 마지막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그를 지탱하는 자부심이다. 하지만 그는 5·18을 내세워 단 한번도 사익을 취한 적이 없다. 정대하 기자
‘실탄 소지자’로 분류된 그는 붙잡힌 뒤 군인들에게 마구잡이로 폭행을 당했다. 현실감이 없었다. 얼굴이 시멘트 바닥에 짓이겨져 피가 흘렀다. 노동자·대학생 형들과 함께 굴비처럼 엮어져 끌려갔다. 군인들이 탄 버스에 오르면서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1979년 대동고 2학년 수학여행 때 찍은 사진. 전영진(둘째 줄 오른쪽 셋째)과 이덕준(둘째 줄 가운데)은 여고생들과 미팅을 함께 할 정도로 친한 친구 사이였다.
“내가 맞아요. 그 ‘잠바’(점퍼)는 나주 노안에 갔을 때 슈퍼 아저씨가 줬던 얇은 여름옷이에요.” 고개를 숙인 채 줄지어 가던 시민군들의 행렬을 찍은 사진에서 그는 미색 잠바를 뚜렷하게 기억했다. 금남로에서 군인들의 집단발포로 무고한 시민들이 사살당했던 5월21일, 그는 일신방직 앞에서 시민군 차를 잡아탔다. 차량은 전남 나주의 영산포로 향했다.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한 그들은 총 한자루씩을 챙겼다. 그날 밤 광주 효천역 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군인들과 첫 총격전을 벌였으나 화력에 밀려 결국 나주로 퇴각했다. 노안면의 한 슈퍼 주인이 고생한다며 저녁 밥상에 옷까지 건넸다.
이덕준은 대동고 친구 전영진(윗줄 맨 왼쪽)이 총을 맞고 죽었다는 말을 듣고 시민군의 거점이 있는 금남로로 나갔다. 사진은 5·18 때 희생당한 중·고교생들로 모두 16개 학교 18명이다. 연합뉴스
경계망을 뚫고 간신히 광주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삶을 뒤흔들 또 다른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대동고 친구 전영진이 총에 맞아 죽었다고 전했다. 고2 때 같은 반이었던 전영진과는 둘도 없는 사이였다. 5월19일부터 같이 과외도 받기로 했다. “영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온종일 울었어요. 실신을 할 지경이었어요. 할머니가 ‘아가, 아가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하시더라구요. 갑자기 드는 생각은 (도청으로) 나가야겠다는 것뿐이었어요.”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금남로로 갔다.
1981년 2월 졸업식 때 무기정학이 풀리지 않아 참석하지 못한 이덕준은 졸업식이 끝난 뒤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대동고 교사로 재직하던 박석무 전 국회의원의 영향을 받아 바른길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던 그였다. 고2 때부터 진보적 인사들이 운영하던 양서조합에 나가 형들이 건넨 이른바 금서들을 읽었다. 들불야학 선배들 중엔 광천동 동네 형들도 있었다. 5월25일 와이더블유시에이로 들어가 총을 들기까지 그의 삶은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청소년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와이더블유시에이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자리했다. 함께 있었던 들불야학 박용준(1956~1980) 형의 죽음을 안 것은 군 영창으로 끌려간 뒤였다.
38일 만에 군 영창에서 나왔다. 80년 7월 석방돼 8월에 학교로 돌아갔다. 10월 또다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대동고 독서회 회원이 아니었는데도 배후조종자로 몰렸다. 505보안대 요원들은 검은 승용차를 학교 앞에 대고 그를 불렀다. “사무실로 데려가 우유 한잔을 건네준 뒤 ‘어떻게 지내?’라고 묻곤 했어요. 지켜보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의미였지요.” 거의 날마다 술로 살았다. 무기정학이 풀리지 않아 졸업식에도 가지 못했다.
이덕준은 1981년 전남대에 입학해 탈춤반에 들어가 마당극 등을 연출하다가 구류를 사는 등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대학에 입학해선 학생운동을 했다. 전남대 탈춤반에 들어가 마당극을 연출하다가 두차례 구류를 살았다. 1982년 10월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수배됐지만 구속을 피했다. 하지만 3학년 때 강제징집돼 군대로 끌려갔다. “후배 입영전야 파티에 갔다가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가 자고 있었는데 형사들이 들이닥쳤어요. 징집 서류엔 문교부·내무부·국방부 장관들의 도장이 찍혀 있더라구요. 어머니가 보고 계시는 앞에서 그대로 군대로 잡혀가 인근 31사단에서 바로 머리가 깎였지요.”
데모하던 대학생인 그는 전방으로 배치됐다. 5사단 지오피(GOP)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도 가끔 보안대에 끌려가 정신교육을 받았다. 강제징집된 운동권 대학생 6명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던 시절이었다. 군장 구보를 열심히 해 남들은 8개월 만에 나오는 첫 휴가를 1년여 만에 받았다. 복귀하는 날, 일어판 금서를 몰래 갖고 들어가 막사 부근 땅 밑에 파묻었다. 그리고 일어사전을 찾아가며 경제·철학 공부를 했다. 1986년 2월 제대한 뒤 학교로 복학하지 않고 노동현장을 선택했다.
전남대 어문계열에 입학한 이덕준은 학생운동을 하다가 1983년 여름방학 때 집에서 강제로 끌려가 군대에 입대해 전방에서 군 생활을 했다. 특수학적변동자로 끌려온 같은 처지의 동료들은 그에게 큰 힘이 됐다.
노동자의 첫 시작은 용접공이었다. 1987년 6월항쟁 땐 한달 동안 밤새 거리시위를 하다가 아침에 공장으로 출근하곤 했다. 그해 8월 아시아자동차 하청업체 노동자 50여명이 참여하는 노조 결성을 주도했다. 1989년 노조위원장으로 해고됐다. 노동위원회에서 복직 판결을 얻어냈지만, 회사 거부로 돌아갈 수 없었다. 노동단체 간부가 돼 현장을 지켰다. 2000년 5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미군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 특별조사위원회’ 남쪽 대표로 참석한 혐의로 구속됐다. “한 2년 살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때 6·15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어요. 그 덕에 석방됐죠.”
1987년 7월 노동자 대투쟁 때 광주의 한 사업장에서 노조 결성을 주도했던 이덕준씨.
광주를 떠난 것은 2000년 9월 무렵이었다. 경기도 부천의 거화산업에 용접공으로 취업했다. 철탑 자재를 아연으로 도금하는 공장에서 일하다 용광로에 떨어질 뻔했다. 허리를 크게 다쳐 2년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생계가 급해 고물상에서 고물을 분류하거나 철거작업을 따라다니던 그에게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국회에 진출한 민주노동당 보좌관으로 일하자는 것이었다. “5년 동안 진보적인 법안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탰던 시기지만, 정치활동은 제 옷이 아니었어요.”
노동운동을 하다가 만난 아내 이혜원은 뛰어난 현장 활동가로, 그에겐 든든한 동지다.
아들은 중2 때 노래에 빠지더니 한길로 직진해 지금은 발라드를 부르는 무명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아내는 늘 그의 든든한 동지였다. 노동운동을 하던 시절 광주 대하전자 노조위원장이었던 아내 이혜원(55)씨를 만나 1990년 결혼했다. 아내는 부천에서도 갑을플라스틱 공장에 입사해 노조위원장을 지내던 중 해고됐다. 뛰어난 현장 활동가였던 아내는 진보정당에 투신해 정의당 경기도의회 의원(비례대표)으로 일하고 있다. 아들(29·이견우)은 중2 때 노래에 빠지더니 세종대 대학원 실용음악과를 다니며 무명가수로 살고 있다. “가난을 달고 살아 잘해준 것도 없는데 잘 커줘서 고맙지요. 끝까지 한길로 가는 것은 저와 비슷한 것 같아요.”
노동현장에서 몸을 다친 이덕준은 2012년 부천도시공사 환경미화원 공채 시험에 합격해 거리 환경미화원으로 취업했다. 지금은 소사국민체육센터 강당 환경관리원이다. 정대하 기자
현장을 고민하던 그는 거리 환경미화원을 선택했다. 2012년 부천도시공사가 뽑는 환경미화원 공채 경쟁률은 18 대 1이었다. 가마니 메기와 달리기 등의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5년 동안 거리의 낙엽을 쓸거나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미화원으로 일했다. 2년 전부터 소사국민체육센터 강당 관리를 맡고 있다. “저는 제 삶에 변곡점이 있을 때마다 ‘현장으로 가자. 그게 바른길이다’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이덕준은 2017년 촛불혁명 때 광화문 거리에 앉아 있었다. 자꾸 ‘오월광주’ 생각이 나 혼자 눈물을 훔쳤다.
아내 이혜원은 뛰어난 현장 활동가로, 10년간 진보정당 활동을 하다가 지금은 경기도의회 의원(정의당)으로 일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5·18 고교생 항쟁사를 정리하기 위해 만난 이덕준과 그의 동지들. 김향득 사진가
그에게 친구 전영진은 삶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5·18 희생자들이 묻힌 망월동 구묘역에 갈 때마다 그는 친구에게 담배 한 대를 건네며 다짐하곤 했다. “영진아, 나 여기까지 와 있어. 어디로 도망가지 않고 내가 그래도 여기까지 와 있어.” 1997년 망월동 구묘역에서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하던 날, 처음으로 친구의 주검을 대면했다. “총을 맞고 얼굴이 날아가 정말 반쪽이 없더라구요. 주검을 보며 엄청 울었어요.” 하지만 그는 요즈음 친구의 묘지 앞에 서도 많이 편해졌다. “영진아, 이젠 묘지에 유치원 아이들이 와서 뛰어놀고 그런다. 우리 여기까지 왔어.”
80년 5월 죽음의 고비를 넘긴 그는 항상 힘들고 어려울 때면 현장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요즘 그에게 현장은 다시 ‘5월’이다. 40년 동안 5·18단체와는 단 한차례도 일을 하지 않았던 그에겐 이례적인 일이다. 그는 5·18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국회 앞 농성 소식을 전하는 사진을 보다가 5·18 때 감방에서 함께 지냈던 동신고 출신 경창수를 발견했다. 이덕준은 이 만남을 계기로 지난해 10월부터 고교생 시민군 친구 7명을 다섯차례 정도 만났다. “당시 5·18 고교생 수감자는 14명 정도 됩니다. 1차로 마지막 밤에 남아 있었던 우리들의 구술을 채록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려고 합니다.”
부천/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경기도 부천시 소사국민체육센터 환경관리 담당 이덕준씨. 정대하 기자
1987년 대학을 중퇴한 뒤 노동현장에 용접공으로 취업한 이덕준씨가 노조원들에게 보고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