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나주시 ‘청운 이학동 문화사랑방’에서 이학동 화백이 무궁화 그림 그리는 법을 설명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청운 이학동(100) 화백은 지난 20~30일 전남 나주문예회관 전시실에서 제자 김예지(46)씨와 70년 예술인생을 되돌아보는 특별 회고전을 열었다. 1930년대 나주 성북동 생가부터 제주 백록담 등을 그린 서양화 30여점과 한국화로 그린 무궁화와 산수화도 선보였다. 2014년 작 <고향 가는 길>, 2017년 작 <정읍 내장산>을 빼면 다 최신작이다.
휠체어를 탄 이 화백은 전시 개막식에서 “고향 나주에서 좋아하는 화가의 길을 늦은 나이까지 걷다 보니 이렇게 제자와 함께 전시회를 하게 돼 기쁘다”며 “변함없이 걸어온 백 년의 길 위에서 이제는 앞으로 걸어야 할 길보다 걸어온 길에 대한 반추의 시간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고 소감을 밝혔다.
청운 이학동 화백이 지난해 그린 무궁화 그림. 특별회고전 도록 갈무리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계속 그림을 그리요.”
100살의 나이에도 왕성하게 예술활동을 이어가는 이 화백은 작품활동이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주말도 쉬지 않고 100호 크기(162×130㎝) 그림 창작에 힘을 쏟았다. 매일 아침 7시에 화실에 나와 오후 4∼5시까지 그림을 그렸단다.
‘청운&일심 아틀리에’를 공동 운영하는 제자 김씨는 “이 선생님은 화실에서 정해진 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식사를 하시는 등 시간관념이 철저하신 분이다. 후배 입장에서 마음이 해이해질 때마다 선생님을 보고 다잡게 된다”고 귀띔했다.
화실 곳곳에는 이 화백을 대표하는 무궁화 그림이 걸려 있다. 이 화백은 “일제강점기 때 나라 잃은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무궁화 그림은 그때를 잊지 않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1923년 나주에서 난 그는 일제강점기에 반강제로 창씨 개명을 당했고 스무살 되던 1944년에는 강제로 일본군에 동원돼 일 도치기현 가누마시에 배치됐다. 당시 일제는 중국 등에서 수탈한 곡식을 본토로 옮긴 뒤 동남아 전선으로 보냈는데, 이 화백은 곡식을 동남아행 배에 실어나르는 일을 했다. 그는 “일본인과 함께 일을 했는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매일 곡식이 든 자루를 쉴 새 없이 옮겼다. 젊은 나이였지만 고된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학동 화백이 20일 나주문예회관 전시실에서 특별회고전을 개최하는 소감을 말하고 있다.김예지씨 제공
나주 고향으로 일제 강제동원 고초
해방 후 오지호·허백련 화백 사사
61년 나주문화원 세워 초대 원장
나라 사랑 전파하려 무궁화 그림
구순에 문화사랑방 열어 무료강습
20∼30일 제자와 특별회고전
해방 후 귀국한 그는 어린 시절 꿈꿨던 그림을 배우고 싶어 1947년 조선대 미술과 1기로 입학했다. 한국 인상주의 화풍을 개척한 오지호와 1세대 추상화가 김보현에게 서양화를, ‘남종화의 거장’으로 꼽히는 의재 허백련에게 한국화를 배웠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인 1948년 여수중에 미술교사로 부임해 고흥, 나주 등에서 37년간 교편을 잡았다. 청소년 노동자를 위해 1970년대 중반부터 10여년간 자비로 야간 중학교도 운영했다.
한국전쟁 뒤 우리나라에 미국문화원이 생기자 한국에도 우수한 문화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1961년 나주문화원을 창립, 초대 원장을 지냈다. 같은 해 나주에서 첫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다. 또 한국화 기법으로 무궁화를 작품에 담아 나라사랑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2021년에는 어린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며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키웠으면 하는 바람으로 ‘맑은 미술제’를 개최했다.
2013년 5월 나주시 중앙동에 문을 연 화실 겸 문화공간 ‘청운 이학동 문화사랑방’은 예술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장소다. 이 화백은 이곳에 한국화, 서양화 도구뿐 아니라 드럼, 아코디언 등 각종 악기를 가져다 놓고 무료로 강습하고 있다.
이학동 화백이 지난해 그린 ‘눈 내린 고향 마을’. 특별회고전 도록 갈무리
이 화백은 “젊었을 적 넉넉지 않은 형편 탓에 그림을 어렵게 배웠다. 그림이나 음악을 배우고 싶은 사람이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다”고 말했다. 2010년 한국예총 공로상, 2016년 나주시민의 상, 지난해 나주교육상 등을 수여하며 문화계 후배들과 나주시민들은 이 화백의 공로를 잊지 않았다.
이 화백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붓을 놓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나는 무궁화를 마음에 담아 행복하게 작품활동을 했다. 코로나 때문에 몸과 마음이 힘든 시기였다. 예술이 사람들에게 위안을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이학동 화백이 1970년대 중반 청소년 노동자를 위해 나주시 금계동에서 10여년간 자비로 운영했던 비비에스(BBS) 야간 중학교 터. 김예지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