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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야학’ 고 박기순 열사의 넋 44년만에 집으로 돌아오다

등록 2022-05-31 19:48수정 2022-06-01 10:04

고향 보성집에서 첫 치유 예술제
‘시네 댄스’ 전문 사유진 영화감독
춤과 영화를 결합한 장르의 독립영화를 하는 사유진 감독이 지난 5월27일 전남 보성 고 박기순 열사의 집에서 치유 예술제를 진행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춤과 영화를 결합한 장르의 독립영화를 하는 사유진 감독이 지난 5월27일 전남 보성 고 박기순 열사의 집에서 치유 예술제를 진행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우리한테 과연 무슨 의미를 건네려고 그렇게 일찍 가셨느냐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춤과 영화를 결합한 ‘시네 댄스’라는 장르의 독립영화 작업을 하는 사유진(54) 감독은 지난 27일 전남 보성군 노동면 용호리 고 박기순(1957~78) 열사의 고향 집에서 고인의 넋을 치유하는 예술제가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

전남대 사범대 3학년 때 노동현장에 들어간 박기순은 1978년 7월 들불야학을 창립해 노동운동을 하다 불의의 사고로 21살에 세상을 떴다. 사 감독은 “5·18 영화 작업을 하며 들불야학과 박 열사를 알게 됐다. 고인의 평전을 읽은 뒤 세상을 떠난 모습이 그려져 가슴이 아팠다”며 “영혼 결혼식과 ‘임을 위한 행진곡’, 윤상원 열사를 먼저 설명해야 박 열사를 떠올리지만, 한편으론 박 열사는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 감독은 박 열사의 큰오빠이자 보성 불이학당 당주인 박화강 전 <한겨레> 기자를 만나 ‘고향 집 치유 예술제’를 제안했다. “고인이 딛고 다녔을 마당과 툇마루, 은행나무가 지켜보는 공간에서 추모의 춤과 시, 노래를 올리고 싶다”는 사 감독의 뜻에 가족들이 공감했다.

전남도 무형문화재 신안씻김굿 이수자 김정희 명인. 정대하 기자
전남도 무형문화재 신안씻김굿 이수자 김정희 명인. 정대하 기자
한판 굿으로 고 박기순 열사의 넋을 위로하고 있는 신안씻김굿보존회 회원들. 정대하 기자
한판 굿으로 고 박기순 열사의 넋을 위로하고 있는 신안씻김굿보존회 회원들. 정대하 기자

맨발로 치유의 춤을 추는 솔문 김진수씨. 정대하 기자
맨발로 치유의 춤을 추는 솔문 김진수씨. 정대하 기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예술인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해 판이 더 커졌다. 고인의 넋을 위로하는 굿 의례는 전남도 무형문화재 제52호 신안씻김굿보존회에서 맡았다. 김정희 신안씻김굿 이수자가 이동철·백금열씨의 장단에 맞춰 안당, 넋올리기, 씻김, 길닦음 순으로 굿을 올렸다.

사위가 어두워질 무렵 사 감독은 아프리카 세네갈 시인 비라고 디오프의 ‘혼령’이라는 시를 낭송했다. “…죽은 이들은 영원히 가버린 것이 아니에요/그들은 빛나게 될 어둠 속에 있고/어두워지게 되는 어둠 속에 있을 뿐이에요/…죽은 이는 결코 죽지 않았어요…” 이어 춤꾼 솔문 김진수씨가 맨발로 치유의 춤을 췄고, 굿을 보며 내내 눈물을 쏟았던 가수 온유가 추모의 노래를 불렀다.

동네 주민과 불이학당 회원, 지인 등 30여명이 마당에 둘러앉아 고인의 넋을 기렸다. 박 열사의 언니 양순(73)씨는 “가족들은 서로 마음의 상처를 헤집지 않으려고 기순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살았다. 처음으로 고향 집에서 열린 치유 예술제를 보고 나니 마음이 좀 풀린다”고 말했다.

고 박기순 열사 추모곡을 부르고 있는 대구 출신 가수 온유씨. 정대하 기자
고 박기순 열사 추모곡을 부르고 있는 대구 출신 가수 온유씨. 정대하 기자
“국가 폭력에 의한 학살 현장에서 죽어간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작품을 계속 하고 싶습니다.”

1996년 서울예전 영화과를 졸업하고 ‘충무로’에서 조감독을 한 뒤 다큐멘터리 <다비드의 별>로 데뷔한 사 감독은 현재는 극 영화와 다큐멘터리, 실험영화가 혼합된 예술영화를 만들고 있다.

사 감독은 “박기순 누나는 한정된 삶을 살았지만 한정되지 않은 삶을 지향했던,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 아름다움이 내 가슴에 살아 있으니 죽어도 죽지 않은 것”이라며 “내년에 공식 추모 예술제 땐 장학금을 조성해 고인의 보성여중 후배들에게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 바로가기 : “불꽃처럼 살다간 ‘존경스런 내 친구’ 박기순에게 바칩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area/880246.html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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