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당시 고속버스를 몰다 경찰을 치어 숨지게 한 배용주씨가 19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유족을 만나 사죄하고 있다. 5·18조사위 제공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위대 버스를 운전하다 경찰 4명을 치어 숨지게 한 운전사가 유족에 사죄했다. 유족은 운전사를 부둥켜안으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한다고 통곡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5·18조사위)는 19일 국립서울현충원 경찰충혼탑에서 5·18 때 버스로 경찰을 치어 숨지게 한 배용주(76)씨와 경찰유족이 만나 사죄와 용서를 하는 자리를 가졌다고 밝혔다.
배씨는 유족 10여명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사죄의 마음을 전했고 유족들은 너그러이 받아줬다고 한다. 유족 대표 ㄱ씨는 “책임 있는 자들은 다 회피하고 외면하는데 이 자리까지 용기 있게 나와주셔서 감사하다”며 “배 선생님이 많이 힘드셨다고 알고 있다. 건강하게 사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광주시민을 해친 경찰가족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어렵게 살았지만 정부로부터 어떤 보상과 위로도 받지 못했다”며 “이번 만남을 계기로 경찰 유가족의 명예회복을 반드시 해달라”고 당부했다.
고속버스 기사로 일했던 배씨는 1980년 5월20일 전북 남원∼광주간 노선을 운행하다 시위대 차량 행렬에 동참했다. 배씨는 밤 9시께 광주 동구 옛 노동청 앞에서 버스를 몰아 옛 전남도청으로 향했고 저지선을 구축하던 경찰들을 치었다. 이 사고로 광주 지원을 나왔던 함평경찰서 소속 정충길(당시 47살) 경장, 강정웅(38)·이세홍(38)·박기웅(37) 순경이 숨지고 7명이 다쳤다.
같은 해 5월29일 살인과 소요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배씨는 1심 재판에서 “당시 최루가스 때문에 운전할 수 없어 운전대를 놓고 운전석 밑으로 몸을 움츠렸다. 버스가 도로 귀퉁이에 처박히자 달아났다. 비명은 들었으나 경찰이 숨진 지 몰랐다”고 항변했지만 10월24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18일 오후 전남 무안군 전남경찰청 내 안병하공원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발포를 거부한 고 안병하 치안감과 사고로 순직한 함평경찰서 경찰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전남경찰청 제공
같은 해 12월29일 2심과 1981년 3월31일 대법원에서도 사형 선고가 나왔다. 배씨의 가족과 5·18 희생자 유족 등은 명동성당을 점거하며 감형을 요구했고 고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에서도 반발이 이어졌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1981년 4월3일 배씨 등 사형수 3명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뒤 이듬해 3월 징역 20년형으로 다시 감형, 같은 해 성탄절 때 특별사면했다.
배씨는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자 1997년 재심을 신청했고 이듬해 광주고법은 “배씨의 행위가 헌정질서 파괴범죄(군사반란 및 비상계엄)에 저항한 정당한 행위”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1심 때 군 법무사로서 재판부로 참여했던 김이수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2017년 배씨를 만나 사과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전남경찰청은 2017년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이라는 보고서를 펴낸 뒤 청사 앞에 고 안병하 치안감 동상과 함께 순직 경찰 4명의 추모비를 세우고 매년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숨진 경찰들을 안타까워했던 배씨는 최근 5·18조사위에 사죄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안종철 5·18조사위 부위원장은 “순직 경찰 네 분을 포함한 피해 경찰 모두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가족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도록 진상규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해 1월 5·18진상규명법이 개정되며 5·18조사위는 경찰과 군의 피해도 조사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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