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산불피해자 및 고성 상공인 비상대책위원회’가 지난 3일 한전 속초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실질적인 보상과 신속한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은 산불로 전소한 차량에 다시 불을 붙인 모습. 비대위 제공
지난 3일 오후 강원도 속초에 있는 한국전력공사(한전) 속초지사 앞에 주차된 차에서 붉은 화염과 함께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지난 4월 강원도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이 붙인 불이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그동안 정부를 믿고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달라질 것이다. 정부나 한전으로부터 우리의 권리를 되찾을 때까지 죽을 각오로 투쟁하겠다”고 외쳤다.
산불은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에게 공포로 기억된다. 지난 5일 고성군에서 만난 한 이재민은 울먹이고 있었다. 그는 새까맣게 타버린 보금자리 앞에서 “시뻘건 불덩이가 펄쩍펄쩍 뛰어 순식간에 온 마을을 집어삼켰다”고 말했다. 일부 주민들은 ‘불’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깜짝 놀랄 정도의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 이렇게 화마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이재민들이 ‘불’을 들고 나섰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산불이 났을 초기만 하더라도 이들에게는 일말의 ‘희망’이 있었다. 지난 4월4일 강원도 고성·속초·강릉·동해·인제 등 5개 시·군에서 산불이 발생하고 이틀 뒤인 4월6일 정부는 이 일대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문재인 대통령뿐 아니라 이낙연 국무총리와 장차관이 하루가 멀다 하고 화재 현장을 찾았다. 특히 이 총리는 정부를 대표해 “현행 제도를 뛰어넘는 지혜를 짜고 있다. 제도에 안주해 이것밖에는 안 된다고 하지 않겠다”며 이재민을 위로했다.
이재민들이 묵묵히 정부의 조처를 기다린 것은 이 때문이다. ‘제도를 뛰어넘는 지혜’를 약속한 정부의 말을 이들은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난 5월1일 정부는 ‘강원 산불 피해 종합복구계획안’을 발표했다. 복구비 1853억원을 지원하는 것이 뼈대다. 그런데 이 가운데 인명 피해와 주택 전파·반파, 농업·임업·소상공인 피해 등 이재민 지원은 12.5%(245억원)에 불과했다. 나머지 87.5%(1608억원)는 산림·문화관광·군사시설 등 공공시설 복구를 위해 책정된 예산이었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이번 복구계획은 주거 안정과 생업 재개에 초점을 뒀다”고 생색을 냈다.
반면 복구계획안을 발표하면서 “전액 피해 주민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밝힌 국민성금은 560억원(6월 현재)에 이른다. 이재민을 직접 지원하기 위해 정부가 편성한 예산의 두배가 넘는 금액이다. 이재민 지원책이 결국 국가 지원보다는 국민의 호주머니에 기대고 있는 셈이다. “국민 여러분께 너무 감사하다. 하지만 국민들이 소중히 보내주신 성금을 왜 정부가 준 것같이 생색을 내는지 모르겠다.” 정부 지원에 ‘속초 산불피해자 및 고성 상공인 비상대책위원회’가 보인 반응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했다.
갑작스럽게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은 6300만원으로 집 한채를 뚝딱 지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주택 전소 때 피해 보상금은 정부 지급 주거지원 보조금 1300만원에 정부가 도를 통해 지원하는 복구비 2천만원, 여기에 국민들이 낸 성금 지원금 3천만원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내가 내지도 않은 산불로 보금자리를 잃었는데 빚을 내 다시 집을 지으라는 말이냐”고 이재민들이 반발하는 이유다.
부족한 금액에 대해선 발화 원인을 제공한 한전 쪽에서 추가로 배상을 받을 수도 있다. 물론 경찰 수사에서 한전 쪽 과실이 입증돼야 한다. 경찰은 두달이 넘도록 수사 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다. 또한 배상 규모를 놓고는 최종 판결이 나기까지 수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산불 발생 두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임시대피소 등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이재민이 590여명에 이른다.
당장 살 집이 시급한 주민들은 정부가 나서서 우선 보상하고 나중에 한전에 구상권을 청구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산불로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이재민에게 이 일마저 떠넘기면 안 된다. 이 총리가 언급한 ‘제도를 뛰어넘는 지혜’가 절실한 때다.
박수혁
전국2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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