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의회가 18개 시·군에 지역상담소 설치하려다 시민단체 등이 반발하자 본회의 상정을 보류했다. 강원도의회 제공
“그동안 광역의원들이 지역민원 수렴을 위한 창구가 없어서 일을 못 했습니까? 시·군·구와 행정복지센터, 이·통·반장 등 이미 차고 넘칩니다. 의회 누리집에도 민원 게시판이 있고, 의원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서도 언제든 민원을 수렴할 수 있습니다.”
양선재 전국공무원노조 강원지역본부장이 지역상담소 설치 조례를 추진한 강원도의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민원 수렴 공간이 없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고 실상은 차기 선거를 위한 지역거점을 마련하겠다는 술수가 아닌지 지극히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강원특별자치도가 되고 나니 벌써 잿밥에만 관심을 두며 자신의 특권과 특혜를 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5년 동안 46억원
광역의회의 지역상담소 설치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강원도의회에선 지난달 30일 최승순(국민의힘·강릉5) 도의원이 ‘강원특별자치도의회 지역상담소 설치·운영에 관한 조례안’을 대표 발의했다. 해당 조례안은 도민 고충 민원 수렴을 위해 지역상담소를 설치·운영할 수 있고, 필요한 경우 민원상담관을 위촉할 수 있다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문제는 지역상담소를 설치하고 운영하려면 연간 10억원 가까운 예산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점이다. 도의회가 추산한 예산 내역을 보면, 첫해 11억7000만원 등 해마다 8억6000만원이 필요하며 5년 동안 필요한 예산은 모두 46억2600만원에 이른다. 세부적으로는 사무실 임대료와 민원상담관 인건비 등이다.
강원도의회는 입법예고 한지 불과 열흘 뒤인 지난 10일 상임위원회를 열고 조례안을 원안가결하는 등 속도전에 나섰다. 상임위 도의원 12명 가운데 9명이 조례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상임위에서 이승진(더불어민주당·비례) 도의원이 “입법·정책 건의하고 도민 고충민원 등의 업무를 하게 되는 의정모니터단의 역할과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고, 박관희(국민의힘·춘천1) 도의원도 “비용 문제에 대해 도민들의 물음표가 있다. 준비가 부족하니까 조금 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제기했지만 소용 없었다. “(연간)8억원을 들여 민원 해결 한두 건만 해줘도 그만한 가치는 있다”(지광천 도의원·국민의힘·평창1), “상담소를 마련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를 더 얻을 수 있다”(심영곤 도의원·국민의힘·삼척2) 등과 같은 지역상담소 설치 동조론에 동료 도의원들이 힘을 실어준 덕분이다.
강원도의회 의원 등이 지난해 7월 도의회 앞에서 개원식을 하는 모습. 강원도의회 제공
강원도의회가 지역상담소 설치를 밀어붙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강원도에서 행정감시 역할을 해온 강원평화경제연구소는 즉시 성명을 내어 “세계 최강의 전자정부·온라인 민원 행정 시스템이 구축된 대한민국에서 신속한 의견 수렴과 해결을 위해 ‘오프라인 사무실’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민원상담소가 꼭 필요하면 여유 공간이 있는 시·군행정복지센터나 기초의회 공간 일부를 대여해 공유하면 된다”고 비판했다.
지역상담소가 도의원 개인사무실로 전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나철성 강원평화경제연구소장은 “정당법에는 시·도당 하부조직의 운영을 위해 당원협의회 등의 사무소를 둘 수 없다고 명시돼 있는데 지역상담소가 생기면 1인 도의원 지역인 화천·정선·양구·인제·고성·양양 등 6개 시·군은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는, 합법적 비서를 채용한 개인 사무실로 운영될 수 있다. 2인 이상 지역도 같은 당 소속 의원들이 당선되면 당 조직 관리를 위한 거점사무소로 전락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시민사회단체가 1인 시위를 예고하는 등 반발이 거세지자 결국 강원도의회는 지역상담소 조례를 지난 21일 열린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례안 마련을 주도한 도의원들은 “여론의 향배를 살펴 재추진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히고 있어 불씨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경기도의회가 지난 5월 양평에서 ‘지역상담소 사무직원 활성화를 위한 소통의 시간’을 주제로 워크숍을 여는 모습. 경기도의회 제공
■6개월 동안 상담 실적 0건
지역상담소 논란은 강원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국 광역의회 가운데 가장 먼저 지역상담소를 설치한 곳은 경기도다. 경기도의회는 2015년 지역 31개 시·군에 지역상담소를 설치했으며, 충남도의회도 2019년 조례를 제정해 18곳에서 지역상담소를 운영 중이다. 하지만 두 곳의 올해 상반기 월평균 상담 건수는 경기도 9건, 충남도 4건에 불과하다. 특히 충남 청양군은 올해 상반기 동안 단 한건의 상담도 없었다.
안가영 충남도의회 도민소통팀장은 “아직 초기 단계라 경기도의회처럼 주5일이 아니라 주3일 정도 탄력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운영 일수가 적다 보니 상대적으로 실적이 적은 면도 있다. 또 청양군도 상담 처리 내역을 올리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로 상담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앞으로 실적 관리 등에 대해서도 좀 더 세심하게 챙기겠다”고 말했다.
전남도의회도 지역상담소를 설치하려 했지만 반대 여론에 밀려 진척이 없다. 전남도의회는 지난 2월 지역상담소 설치 조례안을 의회에 상정했지만 현재까지 상임위에 계류된 상태다. 이기환 전남도의회 총무팀 주무관은 “조례안을 대표 발의한 의원이 좀 더 숙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고, 의회에서도 추가 의견 수렴과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밖에 충북에서는 2019년 당시 이시종 전 충북지사가 확대간부회의에서 지역상담소 설치를 적극 검토하라고 공개적으로 지시했지만, 오히려 도의회에서 설치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낸 바 있다. 전북에서도 2020년 행정사무감사에서 한 도의원이 지역상담소 설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경남도의회는 지난 3월 진주 경남도청 서부청사에 원래 도의원 연구실로 사용하던 공간을 지역상담소 역할도 겸할 수 있게 용도를 바꾼 지역상담소를 설치했다. 경남도의회 제공
반면, 경남도의회는 지난 3월 진주 경남도청 서부청사 2층에 지역상담소를 설치했다. 원래 도의원 연구실로 사용하던 공간을 지역상담소 역할도 겸할 수 있게 용도를 바꾼 것이다. 민원상담관을 따로 두지 않고 기존 사용하던 공공청사 공간을 활용하다 보니 별도로 배정된 예산은 없다. 김현정 경남도의회 소통홍보담당관실 주무관은 “경기도의회 사례를 보고 추진하긴 했는데 예산 문제도 있고 해서 일단 시범적으로 기존 공간을 활용하기로 했다. 상담소로 연락하면 도의회에서 전화를 받아 해당 도의원을 연결해주는 방식으로 운영 중”이라고 말했다.
김유태 충남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 위원장은 “충남 지역상담소 운영을 지켜보면 민원상담관에 선거 캠프 인사를 채용하는 등 도의원들의 자기 사람 일자리 창출 역할만 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은 지역상담소 존재 자체를 알지도 못한다. 있으나 마나 한 지역상담소가 설치돼 혈세만 낭비되는 등 상담소 설치 당시 우려가 현실이 됐다”고 말했다.
박수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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